교직 경력이 제법 된다. 십 년 이상을 수업만 하다 보니 학생들을 집중시킬 수 있는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다. 나는 수업에는 어느 정도의 긴장은 항상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수업시간을 긴장케 하는 요소 중 가장 으뜸은 질문이다. 내 수업에는 늘 질문이 한가득이다. 수업 내용과 지시사항을 확인하는 아주 간단한 것부터 다양한 생각을 표현하도록 돕는(이라 쓰나 '강제된'이라 받아들인다) 열린 내용까지.
수업 시간 질문의 주체는 굉장히 중요하다. 내 수업의 문제는 수업 시간 던져지는 질문의 대다수가 주로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학생의 질문도 허용한다. 그러나 내가 전혀 모르는 내용의 질문이 나올 때가 문제다. 교직 초기 나의 대응은 매우 처참했다. 교사가 되고 첫 10년 동안 나는 교사는 지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교실에서 교사의 무지는 허용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학생이 한 질문의 답을 모를 때에는 못 들은 척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얼버무렸다. 가끔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아는 척하고 말할 때도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면 내가 설명을 잘했을 때도 있고, 이상한 소리만 지껄였을 때도 있다. 후자의 경우가 생길 때마다 교사로서의 내 자신감과 기세는 점점 낮아졌다. 모른다는 사실을 학생들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이 외에도 교사로서 일을 하는 것이 즐겁지 않게 된 순간은 꽤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 자신이 없어지고, 그저 하나의 부속물로써 일하고 있다는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까지. 결국 나는 잠시 도피해 있기로 했다. 학교 밖으로.
아일랜드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말은 어학연수지만, 사실은 도피였다. 그럼에도 본연의 목적에 충실해야 했기에 대학교 어학당에는 꾸준히 다녔다. 여름학교가 지나고 세 번째 학기에는 아이엘츠부터 캠브리지 시험까지 모두 대비하는 시험반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험반은 아닌데, 대학원 진학을 위해 아이엘츠 시험을 치러 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라 마치 시험반처럼 운영되었다.
그날은 A 선생님과 캠브리지 시험을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주어진 질문지를 바탕으로 친구들과 한참을 연습했다. 그런데 magazine 강세를 서로 다르게 두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물었다. magazine 어디에 강세를 넣어서 발음해야 하는지. 그러자 돌아오는 강사의 답,
"글쎄, 헷갈리네. 나는 MAgazine이라고 하는데, magaZINE도 들어본 것 같고. 한 번 찾아볼게."
우리 앞에서 구글링을 하는 강사를 보고 순간 뜨악했다.
'당신, 영어 원어민이잖아? 그런데 발음을 검색한다고? 학생들 앞에서? 진짜? 가능해?'
그러나 이 뜨악함은 곧 자리를 비켰다. 대신 그 강사에 대한 고마움과 호감이 그 자리로 들어섰다.
'그래, 어떻게든 우리에게 정확한 정보를 알리고 싶어 하는 거구나. 고맙네. 아, 저렇게 해도 되는 거였어.'
(참고로 둘 다 가능하다.
https://www.oxfordlearnersdictionaries.com/definition/english/magazine?q=magazine)
그녀는 우리 질문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그 질문을 존중했고 정확한 답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동시에 학생들 앞에서 모르는 것을 인정했다.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할 수 있음을 매우 자연스럽게 인정했다. 내가 아는 것이 확실치 않을 수 있다는 자세로 교사로서의 권위(?)를 매우 자연스럽게 내려놓을 줄 알았다. 그녀가 아리송함을 인정하고 구글링을 하던 그 찰나, 그동안 교실에서 학생의 질문에 대해 내가 보였던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복직 후 다시 교실로 돌아온 나는 이제는 모르는 질문도 기꺼이 받는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아직도 조금 부끄럽다. 그래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한다. "잘 모르겠는데, 우리 같이 한 번 찾아볼까?" 하고. 또는 다른 학생들에게 답할 기회를 넘겨주며 대단하다고 추켜세워주기도 하고. 이렇게 학생들의 질문을 통해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요즘이다.
4학년 과학 전담교사로 일하는 지금 학생들에게서 받은 질문을 몇 가지를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큰 씨앗은 뭐예요?" (검색 결과 바다야자 씨앗이라고 한다. 농구공 크기만 하다.)
"씨 없는 수박은 씨가 없잖아요. 그럼 열매를 맺고 난 이후에 다시 싹이 날 수 없는 거죠? 그럼 씨 없는 수박은 그걸로 대가 끝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계속 나와요?"
(나로서는 씨가 없으니 먹기 편하네 하고 시원하게 베어 먹기만 했는데, 한 학생은 식물의 한살이를 공부하는 동안 씨 없는 수박이 어떻게 자라는지 무척 궁금해한다. 정말 답해주고 싶어 유튜브를 몇 번이나 봤다. 허나,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다.)
"똑같은 공책이 두 권 있어요. 모양도, 크기도 다 같아요. 공책 한 권에는 모든 페이지에 크레파스나 연필로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하고, 다른 공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럼 낙서한 공책은 백지 공책보다 무게가 더 나갈까요?"
(우와! 이건 나도 궁금하다. 물체의 무게 단원 마지막 차시에 자유 실험으로 실행해 보았다. 무게가 더 나간다. 연필-사인펜 순으로 더 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어떤 학생은 한 겹 칠한 무게, 두 겹 칠한 무게, 세 겹 칠한 무게를 측정해보았는데 모두 빼곡하게 색칠했을 때 무게는 규칙적으로 늘어남을 발견했다.)
이미 교과 원리에 고민 없이 익숙해져버린 나는 갖지 못하는 호기심 가득 담은 다양한 질문이 학생들에게서 쏟아진다. 이렇듯 학생의 질문이 주가 되면 교실이 무척이나 활발해지고 수업 내용도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누군가에게는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학생의 질문을 정말 순수한 호기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학생이 되어본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 과정이 일어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나에게는. 사실, 그 전에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궁금증으로 점철된 학생의 질문을 나의 무지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음을 시인한다. 그래도 뒤늦게라도 이렇게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솔직해지자면, 교과 흐름과는 전혀 관련 없는 방향의 질문은 "그만!"하고 자제시킨다. 너무 많은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때가 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다. 학생의 질문은 존중되어야 한다. 충분히 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세운 수업 설계는 수업 시간 내내 유효해야 한다는 관념은 도통 깨지질 않는다. 게다가 방학 전에 교과 진도를 모두 마쳐야 한다는 압박감 또한 여전하다. 그래서 수업 시간 40분이 가끔은 참,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