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의 유혹
세월이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2학년 2학기부터 교생실습을 나갔던 것 같다. 그때는 참관 실습이라 교실 뒤에 마련해 둔 의자에 앉아 선생님들의 수업을 보기만 (물론 배우기도!) 하면 된다. 그런데 사실 매우 특색 있는 수업이 아닌 한 눈에 잘 들어오진 않는다. 대신에 2학년 꼬마 어린이들의 꼬물꼬물한 손과 발표하려고 번쩍 손, 이런 귀여운 모습만 내 눈에 담길 뿐.
3학년이 되면 수업 실습을 시작한다. 2주 동안 두 세 과목의 수업을 하게 되는 것. 그제야 담임선생님들과 같은 실습교사의 수업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수업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무리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수업에 그제야 놀란다. 어떤 교생은 과연 교생이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매우 특출 나게 수업을 진행한다. 자료 제작 아이디어도 놀랍고, 낯선 학생들 앞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핵심 개념을 청산유수 설명하기도 하니. 그러나 나는 낯선 이들 앞에서 굉장히 긴장하는 유형이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 책상이 교실 가운데 있었는데, 후들거리는 내 다리를 보여주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쭈굴이 교생에게 있어 교탁은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두려움을 숨기는 유용한 가림막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내뱉었는지도 모르겠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은 학생에게뿐 아니라 내게도 구원의 종소리였다.
첫 번째 수업을 망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람들 앞에 서서 수업하는 게 너무 힘들다. 떨려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입술 끝은 파르르 떨리고, 어김없이 얼어붙는다. 이런 긴장 상태에서는 내가 준비한 것을 절대 제대로 펼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다음번 수업에는 맥주 1~2잔을 마시고 불콰한 상태로 시작하는 건 어떨까?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긴장이라는 녀석을 디오니소스의 놀라운 마력으로 황홀경에 빠지게 해 엎어뜨릴 수 있지 않을까?
교생 실습을 하는 내내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진지하게 고민되었다, 디오니소스는. 그러나 결국 채택되지 못했다. 맥주 1~2잔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양이라지만, 그래도 술을 마시고 학생들 앞에 선다는 것은 내 도덕적 기준으로는 허용치 밖이다. 그리고 디오니소스는 절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단지 일시적 회피 수단일 뿐. 수업이 있는 매번 그렇게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진짜 교사가 된 이후에는 어쩔 것인가? 매일 아침 불콰해진 상태로 학생들 앞에 서야 하는가? 나는 그런 나를 용납할 수 있는가? 대답은 NO.
결국 내가 선택한 방안은 바로 스피치 학원. 대학교 4학년, 실습을 앞두고 친구와 함께 스피치 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3분 스피치 과제를 주셨다. 주제는 자유. 일주일 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자 하셨다. 그리고 발표를 할 때 유념해두어야 할 호흡, 눈빛 처리, 자세, 말의 강세와 빠르기 등을 일러주셨다. 발표 나흘 전에 원고를 준비하고 사흘 동안 예순 번은 넘게 연습을 했다. 버스 안에서도, 강의실 가는 길에도, 변기에 앉아서도, 샤워 중에도, 중얼중얼 중얼중얼. 욕실은 거울 속 나를 청중이라 생각하며 눈 맞추는 연습과 내 자세를 확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발표 당일 선생님은 물론 함께 하는 수강생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정말 많이 연습했군요.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눈에 다 보여요."
"이 3분 스피치 이후로 수업 시간 4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학생과 교사 모두 대만족이었습니다" 하는 해피엔딩으로 이야기가 끝나지는 않는다. 여전히 나는 수업 중에 버벅대는 교생이었다. 초반에는 학생들의 주목을 끌었다가 이후에는 그 관심의 눈빛이 교실 여기저기를 배회하게 만들기도 했고, 수업 중간 말문이 턱 막혀버리기도 했고, 여전히 좌충우돌 교생이었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조급하지 않았다. 지금은 과정을 겪어내며 연습하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디오니소스에게 굳이 구조 요청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적절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약삭빠르게 뭔가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드리스 샤흐
디오니소스에게 연애편지를 띄우며 나를 부디 만나 주오 했더라면, 그 일로 두려움을 떨쳐내려 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