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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일멘토 Apr 18. 2019

김필주의 과거 여행 1_고난의 행군

* <북한을 떠나다>는 통일멘토 프로젝트팀이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북한 출신 청년들이 직접 작성하고 프로젝트팀이 함께 편집하고 있습니다.



김필주:

피스브릿지 대표, 통일대학생동아리연합 대표.

북한 함경북도 새별군에서 태어났으며 현재는 가톨릭대학교 심리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비행기가 대한민국 상공에 진입하였습니다.

2006년 2월 8일, 대한민국 인천공항 하늘 위를 날고 있을 때 기내에서 흘러나오는 승무원의 안내방송을 듣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 안내방송은 당시 나에게는 단순한 안내방송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아도 되고 불안에 떨 필요 없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갈 날만 남았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13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터전에 적응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리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갖기 위해 과거 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나는 1986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새별군의

한 농부의 가정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세상에 나오면서 무엇이 부족했던 것인지 혈우병을 안고 그것도 예정일보다 앞서 급하게 서둘러 나왔다.

혈우병은 선천성 유전병으로 혈액 속에 응고인자가 부족하여 출혈 시 지혈이 잘 되지 않는 희귀 난치성 질환이다. 태어나 첫 돌을 맞기 전에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무려 30여 년 전인데 북한 의학으로 이 병을 진단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북한의 의료 기술이나 시설은 평양이라면 모를까 일반 주민들이 활용할 수 있는 지역은 매우 열악하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그 혈우병 때문에 한 때는 어차피 안고 나올 거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편리하고 유리한 무엇을 안고 나올 것이지 왜 하필이면 혈우병을 가지고 나와 나의 삶을 이토록 고달프게 하는지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어쩌면 혈우병으로 인하여 나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난의 행군'의 시작이었다. 아니 어쩌면 수정되는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었지만 부모님과 나만 몰랐는지도 모르겠다.



고난의 행군

오늘의 과거 여행 테마는 '고난의 행군'이다.

고난의 행군은 1990년대 중후반 북한의 식량난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고난의 행군은 나에게 있어서도 북한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로 의미가 크다.


북한은 1990년 초 공산주의를 추구했던 이웃 국가들이 하나 둘 몰락하면서 그 영향을 받아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망을 기점으로 국가경제 상황에 적신호가 켜졌다. 이후 배급이 끊기게 되고 종단에는 배급을 기대조차 하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재해인 수해(水害)까지 발생하였다. 그 결과 북한의 많은 주민들이 식량난에 굶주려야 했고, 많은 아이들은 영양실조를 피해 가지 못하고 굶어 죽어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옆집이 비어있으면 그 이유가 가족 전체가 아사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 어떤 지역은 하루 날 잡아서 아사한 시체들을 트럭으로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았다는 설도 있었다. 폐쇄적인 북한 내부로 국제사회가 직접 들어가 조사를 할 수 없으니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아사한 사람은 약 30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의 고난의 행군기

북한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 어머니와 나는 간염 환자들을 돌보는 '간염료양소(간염 병동)'라는 시설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병동에 있는 관계자들과 환자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식모로 일을 하고 나는 식모의 아들로 불다.

내가 5살 되던 해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고 이후로 어머니 살았는데, 보수적이고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북한 사회에서 젊은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살아가는 모습은 주위의 편견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여 주위에 도움으로 외부의 간섭이 상대적으로 적은 간염 병동으로 추천을 받아 그 곳으로 가서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난의 행군이 찾아왔고 간염 병동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 마디로  구조조정을 당한 어머니와 나는 갑자기 갈 곳을 잃게 되었다. 어머니와 나에게 남은 유일한 생계유지 수단은 배급이었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이상 배급을 기대하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이 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식량을 구할 방법을 찾아 나서야 했고
그 방법은 '장사'였다.




당시의 장사라는 것은 일단 북한 당국에서 허용하지 않는 업종이다.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바람이 부는 것을 허용할만무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고 법을 위반해서라도 살아남야만 했다. 당시 어머니 나이는 30대 중후반(지금의 내 나이다)으로 젊고 기력 최고조에 있을 때지만 30여 년 간 장사에 대한 개념조차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사라는 것은 일명 '맨땅에 헤딩'과 다를 것 없었다. 그래서 장사와 관련하여 경험을 가지고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때마침 장사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문제는 나였다. 어머니는 잠시 나를 맡겨둘 곳으로 외가를 생각했지만 그 당시 외가에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모 세명과 사촌동생까지 총 6명이 한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다음으로 친가를 생각했지만 친가도 친할머니, 아버지, 새엄마, 이복동생, 고모와 고모의 갓난아기까지 6명이 한 집에 생활하고 있었기에 공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내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머니와 나에게 있는 공통점 중에 하나가
무엇 하나에 절실하게 꽂히면 될 때까지 해보는 것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절실함 앞에서는 똑같을 것이다.  역시나 포기를 모르는 어머니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찾아내어 나를 친가 쪽에 맡기기로 합의를 보고 장사를 배우러 떠났다.





어머니가 떠남으로 본격 나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맡아주기로 한 친가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나에게 아버지가 쪽지 하나를 쥐어주면서 어머니에게로 가서 이 쪽지를 전달하면 어떠한 지시를 줄 것이고 나는 그대로 행하면 된다고 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길을 나섰다. 당시에 나는 부모님이 하는 말은 어떤일이 있어도 복종해야 한다는 개념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의문이나 질문을 하지 않고 무조건 복종했었다.


당시 아버지 집에서 어머니가 계신 곳 까지는 편도로 약 25km, 왕복 약 50km가 되는 거리에 있었고 그 거리를 도보로 가야 했다. 북한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대중교통은 상상도 하기 어렵다.



모두 11호 열차를 이용해야 한다.


11호 열차라 함은 11자를 닮은 사람의 다리를 비유하여하는 말이다. 북한의 열차는 기공급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달리는 속도도 우리가 생각하는 열차의 속도만큼 이 아니어서 그것을 비유적으로 11호 열차라고 표현했다.  조금 유행을 지나간 듯하지만 우리가 사용했던 모든 국민이 가지고 있는 BMW(BUS, Metro, Walk)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온 BMW라는 차량과 비유하여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나는 11호 열차를 이용하여 편도로 25km  떨어져 있는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찾아가야 했다. 어머니가 계신 곳은 간염 병동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오기 전 잠깐 들렸었기 때문에 기억 속에 있었다.

그 먼길을 혼자 갈 수 없다는 말을 하지 못 했다.  그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한 번 간 곳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때는 그 능력이 나에게 불필요했던 것 같은데 너무나 잘 작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그 능력은 너무 필요한데 지금의 나에게는 그 능력이 퇴보되었는지 찾아보기 어렵다. 어쩌면 그때만큼 간절함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아버지의 명령대로 어머니가 있는 그곳으로 11호 열차를 타고 아침 7시경 일찍 출발을 했다. 왜냐하면 가야 할 거리가 무려 25km나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약 120cm의 키에 11살에서 12살로 넘어가는 해 겨울을 보내고 있었고 북한 겨울은 매우 추웠다. 겨울도 추웠지만 그 보다 당시의 내 마음이 더 추웠는지도 모르겠다.


걷다 쉬기를 수십 번을 하면서 하루가 걸려 어머니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시계는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키 130cm에 11살짜리 아이가 25km를 걸어서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12시간이었던 것이다.



나를 보고 어머니는 매우 놀라워했고 당황해하는 듯했다. 나는 얼른 아버지가 전달하라고 했던 쪽지를 어머니에게 전달하였다. 어머니는 쪽지를 펴고 읽어 내려갔고, 나는 어떤 지시가 떨어질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의 과거 여행, 오늘은 여기까지.








<통일멘토 프로젝트팀>

통일멘토 프로젝트는 청년 모임인 상상 공작소와 시민단체인 사회정의시민행동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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