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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일멘토 May 01. 2019

김필주 과거여행2_너 죽은거 아니니

* <북한을 떠나다>는 통일멘토 프로젝트팀이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북한 출신 청년들이 직접 작성하고 프로젝트팀이 함께 편집하고 있습니다.



피스브릿지 대표, 통일대학생동아리연합 대표.

북한 함경북도 새별군에서 태어났으며 현재는 가톨릭대학교 심리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쪽지를 읽어 내려가는 어머니의 눈과 표정을 나도 따라 읽어 내려갔다.

쪽지를 다 읽은 어머니의 표정은 매우 어두워보였다. '후~' 어머니의 긴 한숨소리가 들리고 바로 지시가 떨어졌다. '들어가자'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에게 장사를 가르쳐주기로 했던 사람의 집이었다. 집에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자녀 오누이가 있었다. 나를 보는 그 사람의 표정도 어둡고 불편해 보였지만 반겨주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참... 너무 불편했다. 분명 어머니 품에 안겼는데, 뭔가 불청객 같은 느낌은 나를 바늘방석에 앉혀놓은 듯했다. 그날 저녁은 어떻게 보냈던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녁은 먹은 것 같은데, 한시라도 빨리 잠에 들고 싶었던 기억뿐이다.



날이 밝았다. 전 날의 피곤함이었을까 눈치 없이 늦잠을 잤다.

깨고 보니 다들 기상한 상태였고 비몽사몽 한 상태의 나에게 그 사람이 말을 건넸다. '잘 잤니?' 어리둥절한 상태로 '예'로 답하고 자고 난 이부자리를 정리하자 부엌에서 어머니가 들어오면서 세수하고 아침 먹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세수를 하고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곧 밥상이 펴졌고 아침 상이 마련되었다. 분위기는 전날 저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편했다. 그렇지만 배고팠기에 얼굴에 철판을 두르고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그렇게 눈치 없는 아침 식사가 끝나갈 무렵 어머니의 입에서 지시가 떨어졌다. '밥 먹고 아버지에게 갈 준비를 해라' 잘 못 들었거나 꿈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느낌으로 보나 눈치 로보나 현실이었다. 아무 말 못 하고 식사를 마치자 어머니가 손을 내밀며 뭔가를 주었다. '쪽지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했던 말과 다를 바 없는 얘기를 하면서 나더러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마음에도 없는 '예'로 답을 하고 다시 그 먼길을 떠나야 했다. 또다시 약 12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깨고 보니 다들 기상한 상태였고 비몽사몽 한 상태의 나에게 그 사람이 말을 건넸다. '잘 잤니?' 어리둥절한 상태로 '예'로 답하고 자고 난 이부자리를 정리하자 부엌에서 어머니가 들어오면서 세수하고 아침 먹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세수를 하고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곧 밥상이 펴졌고 아침 상이 마련되었다. 분위기는 전날 저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편했다. 그렇지만 배고팠기에 얼굴에 철판을 두르고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그렇게 눈치 없는 아침 식사가 끝나갈 무렵 어머니의 입에서 지시가 떨어졌다. '밥 먹고 아버지에게 갈 준비를 해라' 잘 못 들었거나 꿈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느낌으로 보나 눈치 로보나 현실이었다. 아무 말 못 하고 식사를 마치자 어머니가 손을 내밀며 뭔가를 주었다. '쪽지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했던 말과 다를 바 없는 얘기를 하면서 나더러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마음에도 없는 '예'로 답을 하고 다시 그 먼길을 떠나야 했다. 또다시 약 12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역시 해가 지고 어두움이 찾아올 즈음 아버지 집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문 열고 들어선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준 쪽지를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쪽지를 읽어 내려가는 아버지의 눈과 표정을 쫓아 내려갔다. 어제저녁 아버지의 쪽지를 읽어 내려가던 어머니 모습을 대상만 바꿔서 또 보고 있는 것이다. 쪽지를 다 읽은 아버지도 어머니가 보였던 반응과 비슷하게 '하아...'라는 긴 한 숨을 내쉬더니 곧 먼 곳에 있는 어머니를 향해 육두문자를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열불을 토해내더니 나더러 일단 올라오라고 했다. 친할머니, 막내 삼촌, 고모 등 여러 사람들의 눈치가 느껴지긴 했지만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태도는 모르는척하는 것뿐이었다. 눈치 없이 배가 고팠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걸었으니 배고픈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저녁 시간이 훌쩍 넘었고 고난의 행군시기에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잘 먹는 것이었으니 저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밤을 맞이하고 잠에 들었다.



비몽사몽 눈을 떠보니 역시나 모든 가족들은 이미 기상한 뒤였고 나는 또 눈치 없이 늦잠을 잤다. 배는 고프지만 분위기상 티를 낼 수 없었다. 전날 아침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마치 데자뷔처럼.... 다소 늦은 아침상이 차려졌고 많은 시선들을 의식하며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덧 상명하복에 길들여진 군인처럼 아버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좀처럼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 오히려 불안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이 흐르나 싶은 때에 드디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성국아 옷 입어라' 성국이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고 현재의 이름은 남한에 와서 개명한 이름이다. 말했듯이 부모님이 지시하면 나는 질문 없이 무조건 따른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아버지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따라오나' 아버지의 짧은 한마디에 쫄랑쫄랑 따라나섰다. 걸어가는 방향이 뭔가 익숙하여 설마설마하면서 따라갔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나를 외갓집으로 데리고 왔다. 어른들끼리 한동안 언성이 오가더니 아버지가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황당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어리둥절하고 불안하여 두 눈 휘둥그레 뜨고 있는 나를 외할머니와 이모들이 안쓰럽게 보더니 둘째 이모(어머니 아래로 두 번째)가 외출복을 입고 내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섰다. 예감이 안 좋았다.



늘 안 좋은 예감은 현실이 된다.

이번에는 이모가 나를 데리고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간다. 이모도 나와 마찬가지로 11호 열차를 타고 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사람이 나더러 자기 앞으로 나아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나아 앉았더니 똑바로 앉으라고 했다. 내 기준에서는 똑바로 앉은 것인데 똑바로 앉으라고 하니 답답했다. 혹시나 싶어 무릎을 꿇고 앉았더니 다른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주먹으로 나의 이마 정 중앙을 밀듯이 때렸다. 머리에는 별이 보였고 어느 순간 나는 중심을 잃고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어디서 든 습관인지는 모르지만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다시 원위치했더니 또 주먹이 나를 반 구타, 반밀침으로 다시 뒤로 넘어뜨렸다. 그렇게 여러 차례 진행 되자 이마는 붉게 멍이 지고,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당황했는지 종이를 쥐어주며 닦으라는 행동을 했다. 하지만 나는 혈우병을 앓고 있는 희귀 난치성 환자였다는 것이다. 피는 멎을 줄 몰랐고 당황한 그 사람은 어머니를 불러 변명을 대고 어머니는 늘 해오던 방식대로 머리 뒤쪽 가마에 찬물을 적셔 출혈을 지혈시켰다. 그렇게 밤이 찾아오고 모두가 잠에 들었다.



또다시 불편한 상태로 아침 밥상이 차려졌고 식사가 이루어졌다. 밥상에는 어머니와 간염료양소에 있을 적에 어머니와 함께 지었던 찰 좁쌀 밥이 올라와 있었다. 간염료양소에서 구조조정을 당하기 1년 전 근처 산에 산불이 나면서 많은 면적이 불에 타고 벌거숭이가 되었던 지형이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와 함께 그곳을 개간하여 찰 좁쌀을 농사를 지었었다. 그리고 대풍년이 들어 순 알곡으로만 약 100kg 이상의 수확을 했었는데 이후 구조조정을 당하게 되고 아버지 집에서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오가다 보니 사실 이날 아침에 먹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아침밥을 먹고 나자 또다시 어머니에게서 지시가 내려졌다. 역시나 또 쪽지였다. 나에게는 복종 외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길을 나섰다. 그 날따라 걸어가는 그 길이 너무 멀고 힘이 들었다. 해서 그 전과 다르게 길가에 앉아 참 많이도 쉬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점심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당시만 해도 낮 12시가 되면 모든 공장 기업소들에서 사이렌을 울려 시간을 알려주곤 했다. 사이렌이 울리면 뭐하리 어차피 먹을 것 없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주머니 속에 뭐가 있음을 느꼈다. 장갑을 벗어 주머니를 확인했더니 주머니 속에 기름과 사탕가루(설탕)를 바른 찰 좁쌀 눌은밥(누룽지)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있었다. 그 사람과 나 몰래 어머니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매우 짧았지만 너무 행복했었다. 짧은 행복감을 뒤로하고 나는 또다시 걸어야 했고 그렇게 열심히 하루 종일 걸어서 어느덧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성국이를 받아들이면 난 이 집을 떠나겠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나를 보고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은 경악하는 듯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면 일단 먼길 보냈던 애가 또 나타났으니 그것에 한번 놀라고 무엇보다 이마에 검푸른 혹과 함께 흐르는 피를 막기 위해 코에는 허어 연 종이를 둘둘 말아 꽂은 상태로 나타난 모습에 한 번 더 놀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늦은 밤이라 다행히 다시 가라는 말은 듣지 않았지만 취조에 가까운 아버지의 질문공세를 받았다. 보이는 모든 상황에 대해 다 묻고 들은 후 나를 재웠다. 춥고 배고팠다. 무엇보다 너무 힘들고 피곤했다. '이제 자라'는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나는 잠을 잤다. 맞고 싶지 않은 아침이 또 밝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어느덧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버지가 다가온다. 예상했다. 그리고 짐작을 했다. '또 종이쪽지를 주려나?' 종이쪽지는 없었다. 대신 나를 타이르듯이 얘기를 했다. 많은 얘기를 했지만 요약하자면 보다시피 내가 함께 살 수 있는 공간도 부족하고 식구도 많아서 어렵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나를 받아들이면 할머니가 아버지 집을 떠나겠다고 했단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고난의 행군시기에 할머니가 집을 나가면 고생이고 위험하니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다. 고로 나더러 어머니에게 가서 떼를 써서라도 어머니에게서 떨어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또 '예'라는 짧은 답을 하고 차비를 했다.



태어나 처음 스스로 결정을 했다. 어머니에게로 가기 위해 대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나를 반기는 것은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었다. 속담에 '가는 날이 장 날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 날이 하필이면 대한이 소한네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 할 정도로 추운 '소한'이었다. 그 날 이후로 아직까지 그 바람을 만나본적이 없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해 이후로 그렇게 추웠던 겨울도 없었으니까.  어찌 됐건 할머니와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일단 나는 아버지 집을 나서야 했다. 하지만 그 멀고 먼 거리를, 게다가 그 칼바람 속을 뚫고 걸어갈 생각을 하니 너무나 아득하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해서 고민 끝에 스스로 꽃제비가 되기로 결정을 내렸다.

꽃제비란 고난의 행군 시기 양부모를 아사로 잃은 고아 또는 방랑자를 의미한다. 당시에 기차역 대합실에는 꽃제비들이 많았기에 그들과 함께 체온을 나누며 생존하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야말로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의 생존권에 대한 결정을 해보았다. 하지만 너무 일찍 꽃제비들에게 가는 것보다는 낮에는 일단 혼자서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자 기차역과 가까운 한 개인주택의 바람 안 들고 햇빛 잘 드는 구석 한 곳을 정하고 그곳에 앉아서 이 시간 이후의 자신의 생존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길 가던 한 사람이 자꾸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끝내는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너 죽은 거 아니니?


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의 걸음이 매우 다급해 보였다. '야! 너 성국이 아니야?' 새엄마였다. '아니, 보면 몰라서 묻습니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을 했다. '너 죽은 거 아니니?'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은 거 아니냐니, 대체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정신 차리고 한 마디를 던졌다.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합니까? 지금 여기 살아서 버젓이 같이 말을 하고 있는데 죽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합니까?'라고 버릇을 말아먹은 아이처럼 어른을 상대로 화를 냈다. '아니, 지금 너 아버지 너 시체 가지러 농포로 내려갔다.' 들으면 들을수록 황당해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새엄마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하지만 뭔가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새엄마도 매우 당혹스러워하는 내색이었고 여러 가지로 이상한 상황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로 상황을 파악 중에 있는데 새엄마가 한 마디 하였다. '어쨌든 살았으면 됐다. 나랑 집에 가자. 이제 너 아버지가 너를 보내면 내가 막겠다.' 그러면서 나의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때 그 순간의 느낌은 '할렐루야'이다. 물론 그때는 신앙이 없었지만 있었다면 바로 외쳤을 한 마디다. 그렇게 나는 꽃제비를 면했고, 태어나 처음 내린 결정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나의 과거 여행, 오늘은 여기까지.





ⓒ상상공작소n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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