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아키텍처』독후감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스티븐홀의 건축, 들뢰즈의 다이어그램과 디지털 시대

by zo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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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저서는 철학전공, 비건축전공자가 현대건축에 대하여 쓴 책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저자가 건축에 대한 전공지식이 없음에도 건축에 관한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가 현대건축을 주도하는 이들이 철학적, 미학적 관점으로 건축을 바라보는 것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총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부분 중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챕터를 꼽자면 2장과 5장이다.

2장은 [메를로퐁티의 공간론과 스티븐 홀의 현상학적 건축] 이라는 제목으로 기하학적 공간에서 벗어나 현상한적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메를로 퐁티는 추상화된 눈에 의해서 시각적 경험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몸의 개입에 의해서 시각적 경험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총체적인 시각의 체험을 지각이라고 부른다. -56페이지
의미를 창출하는 체험의 근원적 활동이 바로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지각의 활동인 것이다. ... 따라서 공간과 관련된 건축의 임무는 단지 기하학적 공간의 창출에만 만주목하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공간인 일상적 체험의 공간, 혹은 현상학적 공간의 창출에 주목해야 한다. -57페이지


저자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공간에 대한 설명 후 이를 스티븐 홀의 건축에 빗대어 구체적인 공간의 예시를 제시한다. 특히 스티븐 홀 스스로도 메를로퐁티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모든 특정한 장소들의 빛, 분위기, 냄새, 색채감, 역사가 빚어내는 근본적인 독특성을 붙잡는 것이다 -84페이지
나아가 공간은 결코 우리의 시각으로 투명하게 장악할 수 없는 두께를 지니며, 이러한 공간의 두께는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들, 즉 촉각, 청각, 후각, 미각 등의 복합적인 감각의 '얽힘'을 통해서만 느껴질 수 있다. -85페이지
그의 건축에서 빛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순간적 체험 공간이자 동시에 지각의 공간적 경험과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87페이지
이러한 점에서 그는 선 드로잉보다 수채화를 훨씬 더 좋은 매체로 간주한다. 말하자면 그의 건축에서 수채화는 도면과 달리 체험 공간을 시각화한 보조물이 아니라 지각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포함되는 과정이자 절차인 것이다. -90페이지
보다 구체적으로 그는 건물을 디자인할 때 원경, 중경, 근경의 모습을 모두 고려할 뿐만 아니라 이를 하나의 화면으로 중첩시킨다. ... 이 외에 건축에서 지각적 체험을 활성화시키는 방안으로 재료의 물성을 강조하거나 물을 사용하는 것도 그의 건축 디자인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특징들에 속한다. -92페이지

이 챕터를 읽으며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을 해보았으며, 스티븐 홀의 건축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을 통해 그의 건축을 조금 더 깊게 이해하고 스티븐홀이라는 건축가에 대한 큰 흥미를 느꼈으며, 나아가 내가 건축을 할 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5장은 [디지털 시대와 들뢰즈]라는 제목으로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시대에서 벗어나 디지털 툴을 통해 건축을 구상화하고 그려낼 수 있는 지금 시대에서 디지털 매체가 주는 메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챕터이다. 그동안 나는 건축을 하면서도 내가 사용하는 수단이 건축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바이기에 이 챕터를 통해서 새로운 인사이트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저자는 디지털 건축의 등장과 함께 다이어그램이 대두됐음을 알린다. 기존에도 다이어그램은 존재하였지만 작업에서 핵심적인 위치로 부상하게 된 것은 3D 디자인툴을 활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히 기술발전에 더불어 디자인의 새로운 수단이 생겼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이어그램의 활용 자체가 건축 디자인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몇몇 건축가들은 다이어그램의 개념을 들뢰즈의 철학을 통하여 설명하는데, 저자는 들뢰즈 철학에서 다이어그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금 짚어내고, 이를 통해 다이어그램을 건축에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과 목적에 대해서 설명한다.

들뢰즈는 푸코를 다룬 자신의 저서에서 다이어그램이라는 개념이 푸코에게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푸코에게서 다이어그램이란 권력을 실행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눈에 보이는 명확한 제도나 장치와 같은 거시적 모델이 아닌, 미시적 권력이 작동하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틀 혹은 배치 관계를 의미한다. -177페이지
이러한 종합은 오히려 개념을 배제하고 사물을 순수하게 관찰할 때 얻어지며, 주관적 개념을 배제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러한 종합을 '수동적 종합'이라고 부른다. ... 한마디로 도식은 이미 확고하게 틀지어진 동일성의 체계가 아닌 변이와 다양 혹은 체계의 일탈적 요소를 자체에 담고 있는 느슨한 체계이다. -185페이지
베이컨의 회화가 다이어그램을 적절하게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이 현실 세계의 흔적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과의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188페이지
사실 전통적인 건축 디자인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다이어그램이 디저털 건축에서 급부상하게 된 것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조건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다. 디지털 건축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디자인 공정 자체의 변화이다. -193페이지
이에 반해서 디지털을 활용한 3차원적인 설계는 평면기하학이 아닌 해석기하학이나 위상학과 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무엇보다도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갖는 장점은 현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는불규칙한 혹은 비정형적인 사물들의 모습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194-195페이지
실제로 디자인 툴을 활용할 경우 얼마만큼 형태를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가는 임의로 설정된 프로토타입에 얼마나 많은 매개변수들을 적용할 수 있는가로 결정된다. ... 이러한 디지털 디자인의 발전이 가속화할 경우 건축가의 역할은 점차적으로 창조적인 상상가로서 디자인의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디렉터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199페이지
건축가는 자신의 총체적 지식과 예술적 직관, 그리고 인문학적 통찰 등을 동원한 다이어그램을 제시하고 이러한 다이어그램에 따라서 설계와 시공의 모든 과정을 통합하는 디렉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말하자면 다이어그램은 건축공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지식이 총집결된 상상력의 산물로서 건축에 철학이나 인문학, 사회학, 정치학과 같은 수많은 외부적 지식이 개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200페이지
벤 반 베르켈은 순수기하학적인 도형인 클라인 병을 다이어그램으로 사용함으로써 건축 외적인 요소가 건축에 적용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 건축 외적인 요소가 포함된 다이어그램의 적용은 건축적으로 이미 확고해진 터미널이라는 공간이나 확정된 프로그램에 일정한 변이를 요구한다. -202페이지
우리는 디지털 건축에서 다이어그램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이유는 다이어그램을 통해서 건축 디자인이 건축 외적인 요소들, 즉 인문학적 지식, 문화적 통찰, 과학적 지식과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임을 보았다. 건축과 건축 외적 요소의 결합은 전통적인 건축에서 결여되었던 상상력을 복원시켜 주며, 건축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도식을 창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14페이지


책을 다 읽고 개인적으로는 디지털 디자인의 중요성을 다이어그램으로 초점을 맞추더라도 결국 비정형, 알고리즘, 매개변수에 대해서 잘 다룰 줄 아는 것이 기본이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저자가 제시한 다이어그램의 올바를 사용용법의 예시 역시 비정형적 뫼비우스의 띠를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내 스스로 약점이라 생각하는 비정형과 알고리즘에 대해서 공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덧붙여, 현대건축에서 건축가들이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관점에 매몰되어 있어 일상과 건축이 괴리된다는 설명에 일견 공감하면서도, 디지털 건축이 나아가야하는 방향, 즉, 건축과 건축 외적 요소(철학, 인문학, 문화역사과학적 지식) 역시 이와 비슷한 방향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후에 시간이 된다면 이 책을 다시 한번 읽고 그 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을 비교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