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의 유아방과 지하철의 임산부석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전, 나는 종종 둘째를 데리고 평일 오전미사를 다니곤 했다. 그 날도 당연한듯 2층에 있는 유아방에 아이를 내려놓고 미사를 드렸다. 평화의 인사를 드리자마자 나는 10kg인 아이를 안았다. 성체를 모시는 줄에 늦지 않게 끼려면 지금부터 내려가야했다. 아이를 안고 성전을 향해 내려가는 계단은 항상 위태위태했다. 성전에서 성체를 모시고 나니, 다시 2층으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아이와 함께 성전 뒤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미사 중 가장 고요한 성체 후 묵상시간, 둘째 아이는 예상대로 웅얼웅얼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주섬주섬 짐을 챙겨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때, 새로 오신 주임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아기 어머니! 나가지 마세요.”
그리고 신부님은 신자들에게 설명하셨다. 유아방이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아이의 소리가 들릴 때 분심든다 생각마시라, 하느님이 만드신 소리는 모두 아름답다. 나는 신부님의 말씀에 어쩐지 든든함을 느끼며 아이와 함께 파견성가가 울려퍼질 때 까지 성전에 남았다. 나도 당연한 듯 들어갔던 유아방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유아방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편하게 떠들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부모님들 중 다수도 유아방에서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지 않는다. 그 속에서 드리는 미사는 집중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 전례에 따라 일어서고 앉는 것도 따라 보고, 성가를 부르거나 합송을 함께 해봐도 쉽게 분심이 든다. 성전과 연결된 TV화면이나 유리창은, 우리와 성전을 연결시킨 것인지 분리시킨 것인지 모호하다. 아이들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미사의 경건함을 배울리가 만무하다. 단 하나 좋은 점은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전에서 아이를 데리고 미사를 드릴 때면, 작은 소리 하나에도 자연스럽게 하나 둘 돌아가는 사람들의 고개가 보인다. 어떤 분들은 왜 유아방에 가지 않냐고 대놓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아이를 보고 방긋 웃어주시는 분들을 만난다. 돌아가는 고개를 보고 졸였던 마음은 그분들의 미소를 보고서야 겨우 놓인다.
유아방도 처음에는 아이와 그 부모를 배려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생각이 그쯤 미치자, 나는 배려를 위해 만들어진 다른 것들이 떠올렸다. 버스나 지하철에 있는 임산부석이나 노약자석. 교통약자 배려석의 의미는 교통약자들은 그 자리에만 타라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만큼은 최소한으로 그 들을 위해 확보하자는 것이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무렵, 나는 공부를 위해 일주일에 한번 왕복 1시간 반 동안 지하철을 타야했다. 그리고 나는 종종 여러 자리가 비어있을 때 임산부가 임산부석이 아닌 자리에 앉으면 지적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저기 임산부석 비어있는데 저기 가서 앉아요.”
‘이 자리는 다른 사람들 앉게 두세요.’라는 뒷말은 소리는 없지만 생생이 들렸다. 나는 이왕 여러 자리가 비어있으면, 나 다음에 탈 다른 임산부를 위해 임산부석을 비워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 생각을 구구절절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지하철이 만석일 때 양보해주시는 분들을 더 많이 만났다. 성전에서 아이 소리를 듣고 웃어주시는 분들도 자주 만난다. 다만 나는 배려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어느 순간 배척하기 위해 쓰이지는 않나 함께 고민하고 싶다. 약자를 위한 배려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불편을 함께 감수하는 것까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