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리 Jan 31. 2021

속편이 궁금하지 않은 영화

영화 <소울>의 살고 싶은 조와 살기 싫은 22

제가 영화를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이 영화는 속편이 필요 없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쿠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두 주인공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지만 궁금해하지 않기로 작은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뻔합니다. Seize the moment, que sera sera, 지금을 살아라! 등등으로 정리할 수 있을 텐데요. 이미 너무 닳고 닳은 격언이죠? 21세기 바쁘다바빠 현대인들은 이런 격언을 따라 살기는커녕 반감을 갖고, 더 나아가 적개심마저 갖기도 합니다.(제가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네 삶을 떠올려보면 어디 그렇게 살 수 있던가요? 사랑하는 일, your thing! 을 찾으라고 가정, 학교, 미디어에서 지시하지만 우리에게 놓인 선택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먹고사는 일' 외의 것은 '혼날 일'로 치부되기 일쑤였습니다. 생계용 직업 외에 우리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진짜 올인해서 탐구할 수 있는 여건에 놓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 조차 없는 게 현실인데, 이런 현실에 충실히 살라니 얼마나 가증스러운 문구인지.. 부들부들..


다행히 소울의 작감들은 이런 현실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조는 그의 눈에 디바로만 보였던 도르테아 윌리엄스는 하루하루를 똑같이 살아가는 연주자에 불과했고, 그저 머리를 잘 자르는 친구 but 인생은 그다지 흥미가 안 생겼던 바버샵 친구는 손님들과 소통하며 빛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버립니다. 정규직으로서 부모님께 인정받는 삶은 '타협'하는 삶이 아니고, 무대 위 재즈 피아니스트로 박수갈채를 받는 삶 역시 '인정'받는 삶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타협, 인정, 성공, 무의미 같은 가치들은 스스로가 부여하고, 스스로를 옥죄어왔던 장치에 불과했다는 걸 느낀 거죠. 어차피 인생은 뉴욕 거리 위 인파들처럼 떠밀려가고, 지하철 군중들처럼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그 속에서 맛있는 피자 한 입처럼, 떨어지는 단풍잎처럼, 소중한 순간들을 발견할 줄 아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거죠. 


사실 메시지가 여기까지라면 굉장히 부족하겠죠. 헬조선의 한국인이라면 이런 감동에 쉽게 현혹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픽사디즈니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로 22의 수식불가 스파크가 입니다. 22의 스파크는 아직 지구의 언어로는 수식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무엇인지 표현할 수가 없는 거죠. 저는 그걸 '살아 볼 마음'이라고 규정지어 보았습니다. 지구 통행증이 조도, 22도 모르는 이유(하지만 마지막 표정을 보면, 알고 있으나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할 수 있겠네요.)로 완성된 건 그저 '살아 볼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거지 같은 인생이라도 '살아볼 마음'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죠. 살아볼 마음이 이끄는 곳이 마더 테레사나 간디 같은 삶이 될 수도 있고, 비정규직으로 근근이 살다가 하수구에 발을 헛디뎌 죽을 뻔한 평범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렇게 '어떠어떠한 삶'이라는 수식어에서 해방되는 태도인 거죠. 살아볼 마음이 생겨서, 살아봤고, 그걸로 만족스러운 인생이야. 이게 소울이 영화로서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제리들 중 하나가 "왜 멘토들은 그걸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너무 뻔해~ so basic~"이러는데 머리를 그 말투에 머리가 어질 해져 버렸습니다. 왜 직업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냥 지구에서 살기 위해선 '살아볼 마음'만 가지면 충분한데 말이죠.


감히 [인생은 어떠해야 가치 있는 거야!]라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당신의 인생도,, 충분히 멋집니다,,]라고 오글거리게 포장하지 않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이게 인생이라고 인정하고, 이런데도 살아볼래?라고 선택지를 주는 다정한 쿨함이 좋았습니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라'는 메시지 중 '살아라' 위에 방점을 찍은 영화가 <소울>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속편이 중요하지 않은 거겠죠. 조와 22는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가고 있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요. 




작가의 이전글 인간은 자연을 구할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