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줄리 앤 줄리아>의 성장형 캐릭터 줄리
당연하게도 요리보다는 '위로'가 주제인 영화입니다. 저는 줄리를 통해 저를 보고, 성공하는 줄리를 통해 저의 성공을 꿈꾸어 봄으로써 위로 받았습니다.
요즘 흔하게 미디어에서 그리는 소위 '세대론 캐릭터'로는 공감하거나 임파워링되기 어려웠습니다. 흙수저 사회초년생의 으랏차차 고군분투기-☆가 되거나 자살할거라고 세상에 협박하는 비관론자(a.k.a 스위트홈)로 극단적이게 그려지기 쉽상이라서, 작품을 보는 중에는 재밌어도 돌아서면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거나나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죠. k-드라마 이게 정녕 최선이냐?
저는 <줄리 앤 줄리아>를 보고 드디어 & 비로소 최애캐릭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감정이입하고, 위로 받고, 저와 닮아 있음에도 더 닮고 싶은 캐릭터를 발견한 것이죠! 바로 줄리입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줄리는 성공한 친구들로 둘러싸인 평범한 인물입니다. 대학시절까지는 꽤 인정받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미래에 자신감도 높았겠죠?) 소설가가 되겠다고 7~8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흘려보내다 민원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이시국 k-공무원은 꿈의 직장이겠지만 줄리의 직업인 공무원은 감정 노동 상담원에 가깝습니다. 고고학 매거진의 에디터로 일하는 남편과 작은 부엌이 딸린 집에서 소소하게 살아가는데요. 곧 서른을 앞둔지라 '올해는 나도 뭐 하나 제대로 해보자'하고 목표를 세웁니다. 블로그에 1년동안 꼬박꼬박 글쓰기. 글감은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줄리아의 요리책에 나온 527개의 레시피를 만들며 느낀 점이었습니다.
곧 서른, 변변치 않은 직업, 뭐하나 제대로 끝내본 적이 없는 작심삼일형 인간, 그리고 잘나가는 친구들 때문에 잔잔하게 깔려있는 열등감까지 제가 처한 상황과 정말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저와 줄리가 닮았다고 느낀 점은 따로 있습니다. △남편 표현으로 생판 남을 위해서만 글을 쓰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 △친구 표현으로 진짜 빗취 △댓글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팔랑귀 △일어날 법한 실수에도 의미부여 오지는데다 울컥해서 진짜 울어버리는 선택적 완벽주의자라는 점입니다. 덤으로 슬플 때 소금뿌리고 기쁠 때 한박자 늦게 박수치는 엄마까지�♀️
닮은 점이 많다는 것만으로 '최애캐'로 등극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죠. 제가 진짜 이 캐릭터를 닮고 싶다고 느낀 점은 바로 성장형 캐릭터라는 점이었습니다.
줄리는 자신의 목표-과정-성과를 친구에게 알리는 것 뿐만 아니라 도움을 청하고, 축하를 받을 줄 아는 자존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취준생활 오래하다보면 인간성이 박살나는 경우가 많죠. 의도치않게 소시오패스가 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줄리의 건강한 자존감은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는데요. 남편과 다투고 난 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돌아와주길 바란다며 솔직하게 말하는 장면은 멋졌습니다. 하지만 줄리아에게 기대와는 정반대되는 말을 듣고 눈물을 찔끔 흘리다가도 '실제 줄리아'와 '나의 멘토 줄리아'를 분리하고, 성과를 자축할 줄 아는 멘탈을 보니, 정말 닮고 싶은 캐릭터로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구요! 존경하는 존재에게 (사실상)거부 당해도 바스라지지 않고 선을 그을 수 있는 성숙함은 제가 가장 닮고 싶은 부분이었습니다. 줄리에게 줄리아는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인생의 등대가 되어준 존재였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만들어낸 성과가 '허영'이라고 일단락 된다면, 저는 상상만으로도 인성이 파탄날 것 같네요. 진짜 비뚤어질 것 같아요...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룬 것도 참 부러웠어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요리영화 자아찾기ver>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줄리를 통해 저를 봄으로써, 저의 내면 중 어떤 부분을 약점으로 여기고, 어떤 부분을 강점으로 여기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나'가 되고 싶은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해 더 나아진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죠. 저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제대로 된 어른'으로 달라지고 싶었던 것 같아요. 방법을 몰라 헤매고 있기도 하고, 도저히 무언가 달라질 마음이 내키지 않아 정체되고 있는 요즘인지라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극중 줄리가 갓 서른이 되었다는 설정과 줄리아가 꿈꾸던 프랑스에서 살게되었다는 설정은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최적의 시간이라는 극적 장치겠죠? 끼워맞추자면 지금 이 세계도 갓 새해로 접어들었고, 저는 어떤 목표를 세우고,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영화와 설정과 비슷한 상황 속에 놓인 것이죠. 줄리아는 8년만에 책을 출판하고, 줄리는 일년만에 그토록 원하던 작가로 인정받음으로서 꿈을 이루고 영화는 끝이 납니다. 엔딩을 보며, 제 인생도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꽤 생생하고, 선명하게 남기게 되었습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는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이라는 명작을 남긴 감독 노라 애프론의 작품입니다. 메릴 스트립은 줄리아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하구요. 제작비의 세 배나 넘게 흥행 수익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정량적인 지표들은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사실을 또 다른 방식으로 알려주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