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령 공주>의 '자연' 모노노케 히메와 '인간' 아시타카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코시국이어서 볼 수 있는 진풍경들이 전 세계에 펼쳐져 눈길을 끈 바 있습니다. 인간이 집에만 있었더니 동식물들이 빈자리를 채운 것인데요. 인간은 불과 몇 달 정도 자연과 분리되어 있었을 뿐인데도, 동식물은 새 생명을 잉태하고, 물과 바람은 제 자리를 향해 흘러가더군요. 자연의 흐름, 그 생명력의 증거들을 목격하며 인간은 정말 자연의 바이러스인가? 느낄 수 있었던 새삼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연을 사랑하는 감독으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간의 침략적인 태도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그리기도 하죠. 자연을 직역하면 '스스로 그러한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인간을 그릴 때는 아이 조차 순수함과 영악함을, 동식물의 자연을 그릴 때는 포근하지만 독을 품고 있는 날 것의 야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냅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 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더럽다' '난해하다' 정도로 감상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 문화적 맥락에서 배운 표현과는 달라 어색했던 것이죠. 예를 들면, 사랑하는 부모님이 탐욕스러운 돼지로 그려질 때의 난감함, 귀여운 돼지가 성적 매력을 지닌 조종사로 그려질 때의 이질감은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그의 작품이 어른을 위한 것이라는 게 분명 해지는 지점이기도 하죠.
널 좋아하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
그대로 좋아. 넌 숲에서 살아.
영화 <원령 공주>의 가장 잔인한 대사를 꼽아보았습니다. 원령공주는 자연으로, 아시타카는 숲으로 돌아가는 장면 속 대사인데요. 인간은 자연을 구할 수 없다는 진리를 대놓고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지만 이건 너무 뭉뚱그린 표현이에요. 인간은 자연을 고갈시킴으로써 자연이 스스로 흘러갈 수 있는 흐름의 고리를 끊어놓습니다. 영화 속 인간은 경제적 동물로써 철을 생산하고, 사회적 동물로써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사슴신의 목을 노립니다. 인간은 자연으로 대표되는 부족들을 싸워 이김으로써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기에 인간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끝나죠. 아시타카는 그나마 자연의 이치를 알고, 다리 역할을 하는 인간입니다. 함께 살아가자는 말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모순이라는 것을 그도, 원령 공주도 알고 있겠죠. 그가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더 이상의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 또한 모두 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타카의 적극적인 활약이 꽤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주가 깃든 팔을 갖게 되었지만, 분노하기보다는 수용하는 자세를 갖습니다. 에보시를 대하는 태도 역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어 놀랐고요. 선을 넘은 인간의 착취를 인정하고, 자연의 분노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멋졌어요. 감독은 (당연하지만) 자연 앞에서 인간의 자세는 이러해야 한다! 고 아시타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편 내 편 편 가르기 좋아하는 인간들(=접니다.)의 회색분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못난 인간들보단 한 차원 높은 인간, 인류애를 가진 인물이라고 한다면 조금 거창할까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 아시타카. 자연으로 돌아간 원령 공주. 각자 있어야 할 곳에서 이별하는 것만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엔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