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드>는 콘셉트만을 듣고도 설렘이 느껴지던 작품이었다. 지구 자기장이 태양 흑점 폭발로 망가져서 인류의 태반이 죽거나 화상 등의 부상을 입게 될 위기에 처하자, 누군가 홀연히 나타나서 지구 전체를 감쌀 수 있는 방어막인 그리드를 만들 수 있는 공식을 만들어준다. 그는 인류의 구원자이고 미래에서 온 신비한 존재이다.
이렇게 분명한 콘셉트를 가진 작품이라니! 게다가 작가가 <비밀의 숲>의 그 이수연 작가라니!
SF가 가진 수없이 많은 매력 가운데 하나는,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어디까지 ‘과학적’이어야 하는가는 레인지가 넓다. 이 점 또한 장르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현생 인류가 살아보지 못한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 인류를 던져 넣어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살아남느냐를 보는 것도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드>는 자기 세계를 만들어낸 좋은 출발점을 가지고 있었다.
태양 흑점의 폭발과 같은 사건은 지구 전체에게 공평(?)하게 공동의 문제를 던진다.
이거 별로 낯설지 않은데? 우리 현생인류는 자기장 붕괴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공포를 공평(?)하게 겪고 있지 않은가? 전염병으로 인한 팬데믹 말이다.
그리드가 지켜주는 세계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멋진 출발점을 가진 이 작품은 그런데, 필자와 같은 열혈 관객의 기대와는 영 딴판인 방향으로 극을 몰고 갔다.
그리드의 보호 속에 생존하는 지구에서 국정원보다, 국방부보다 더 센 기관이 된 관리국 소속의 인물들이 이 드라마의 주역들이다.
지구를 구원한 그리드의 창시자인 그녀(유령)는 24년 전의 cctv 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다. 유령은 그리드의 공식을 남겼을 뿐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사라졌다.
그런 그녀가 24년 만에 다시 나타나면서 드라마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부터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경찰관 정 새벽(김아중)이 담당한 살인사건의 범인을 유령이라고 불리는 그녀가 구해주고, 그 현장에 우연히 관리국 직원 김새하(서강준)가 목격자가 되면서 유령이 돌아온 것을 알아챈다.
유령이 24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은 관리국 전체에 퍼지고 관리국 안에는 각자의 욕망 때문에 유령을 쫓고 잡으려고 한다.
유령을 잡아서 고문을 해서라도 미래 기술을 빼내려는 자들, 남보다 내가 먼저 유령을 잡으려는 암투, 유령이 과거에 저지른 살인사건 때문에 유령을 쫓는 집요한 주인공, 어쩌다 살인사건 때문에 유령을 접촉하고 목격한 경찰은 자신과 유령, 그리고 살인범 사이의 혈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경악한다.
인류와 지구에 위기가 닥치고 그걸 어떻게 해서든 해결하고자, 그래서 소중한 하나하나의 인생 속의 일상을 지켜내고자 분투하는 영웅이 등장하는 많은 SF들이 있다.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마션> 까지도.
할리우드의 인류 구원의 영웅적 서사가 지겨울 순 있겠다.
하지만! 한국의 SF 속의 주인공들은 전 인류를 구원한 <그리드>의 창시자에 대해 이런 정도의 사적이고 찌질한 복수심 밖에 못 갖는 것일까?
SF의 매력의 다른 하나는 현생인류가 살아본 적이 없는 조건과 세계를 창조하고 그 속에 주인공들을 던져 넣어서 새로운 캐릭터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이건 판타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SF라는 비교적 낯선 장르를 소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른 드라마 장르의 익숙한 문법을 차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장르의 익숙한 문법, 즉 사적 복수심이나 각 집단 부처 간의 실적 경쟁, 개인의 직업적 성공, 지난 결혼의 가정사와 같은 것이 SF라는 장르 본래의 장점을 가려서 심리 추적극과 SF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다면 그 혼용은 효과적이지 않다.
<그리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과연 한번 설치한 그리드는 지구를 영원히 지켜줄 수 있는 영구불변의 것인가? 아니라면, 유령이 돌아온 이유는 한계에 다다른 현재의 그리드 문제를 현생 인류와 함께 해결하려고 온 것은 아닐까? 사적 복수심과 충성경쟁으로 눈이 먼 자들 가운데 유령의 뜻을 이해하게 된 몇몇이 사적 욕망을 억누르고 협력하다가 그들이 가졌던 오해의 일부가 풀리고 (그래서 개인적 복수심도 출구를 찾고!),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한 발자국 먼저 이해한 신인류의 캐릭터로 성숙하는 얘기라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