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2018) 10월 영국 BBC를 통해 처음 방영된 영드 <리틀 드러머 걸 6부작>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1983년 작)이다. 존 르 카레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1963>를 통해 국내에도 많은 스릴러 팬을 보유하고 있는 작가로 이 작품을 통해 드라마 연출 데뷔를 한 박 찬욱 감독은 그를 가장 존경하는 생존 작가라고 밝힌 바 있다.
일종의 심리 누아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서독의 어느 소도시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스라엘 외교관의 집에 가정교사의 트렁크라고 배달된 가방에는 폭탄이 들어있었고 집 안에 어린아이가 있는 채로 폭탄은 터진다. 이스라엘 첩보당국은 폭탄 가방의 전달 경로를 역추적하여 사건 배후가 칼릴이 지휘하는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이며 가방을 전달한 자는 칼릴의 동생인 쌀림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복수를 계획하는 이스라엘 첩보국, 그런데 그 계획이 거의 극장 예술이라고 할 만큼 정교한 완성도가 필요한 것이다. 지난 정부 시절, 국정원 요원이 호텔에서 어느 나라의 노트북을 훔쳐 나오다가 걸리는 바람에 온 국민의 비웃음을 산 사건을 떠올린다면 이 계획은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공들일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이스라엘팀은 테러 조직의 지도자, 최종 목표인 칼릴에게 접근, 복수하기 위해 영국인 여배우, 찰리 로스를 끌어들이기로 한다. 작은 무대에 서기 위해 방문했던 그리스의 휴양지에서 우연을 가장하여 찰리에게 접근한 이스라엘 첩보팀의 가디는 그녀의 호기심을 끄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여배우 찰리는 왜 가디와 가디의 보스이자 전체 쇼의 기획자, 마틴의 계획 속으로 끌려 들어갔을까? 마틴이 꿰뚫어 본 찰리의 본능은 그리스 시골마을의 조잡한 무대보다 훨씬 더 큰 무대를 향한 열망이 숨어있다는 것이었다.
“테러는 극장이다”
마틴은 찰리를 쌀림의 애인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디테일한 연출을 한다. 가디가 쌀림의 역할을 맡아 쌀림과 실제 애인이 주고받았던 편지를 읽어주고 감정까지 느끼게 만든다. 찰리는 쌀림의 애인, 미쉘이 되기 위해 편지를 베껴 쓰고, 죽은 쌀림의 나체를 관찰하며 몸에 있는 모든 상처와 성기의 모양까지도 기억 속에 새긴다.
일생 최대의 배역을 맡은 찰리는 과연 명배우로서의 자질을 발휘하여 쌀림의 대역인 마틴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의 감정을 통해 연인을 시오니스트의 손에 잃은 일종의 영국인 미망인 신분으로 팔레스타인 비밀기지에 잠입한다. 팔레스타인 기지의 까다로운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신뢰를 얻고 종국에는 쇼의 기획자가 원했던 해피엔딩,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의 지휘자이며, 이스라엘 외교관 죽음의 책임이 있는 쌀림의 형, 칼릴을 유혹하고 죽게 만든다.
한국에서는 왓챠에서 감독판을 현재 볼 수 있고 티브이 조선에서는 영국 방영 본을 상영하고 있다. 결코 관객에게 친절한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에 취향에 따라 극단적인 리뷰가 나올 것으로 예상이 된다. 600페이지에 가까운 소설과 그 소설 속의 수많은 인물들의 얽힌 목표와 강점을 풀어낸 솜씨는 역시나 명불허전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출력을 가진 감독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고 <리틀 드러머 걸> 역시 그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아름다운 미장센과 인물에 대한 일관되고 냉정한 거리감이다. 일관성을 일부러 깨는 몇 장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건 다른 영화에서도 박찬욱 감독이 이미 보였던 엉뚱함이다.
그런데 티브이 조선이나 왓챠를 통해 이 드라마를 보는 관객들은 사전 지식이 없다면 이 작품이 박찬욱 감독, 아니 어느 아시아 감독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도 아닌 유럽의 수준급 감독이 만든 명품 심리 누아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의 궁금증은 박찬욱은 무엇에 홀려서 이 작품을 골랐을까? 그리고 왜 모든 세계 사람들이 찬사를 바친 <올드 보이>나 기타 자신의 한국영화 필모와는 동떨어진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어낸 것일까? “유럽풍 드라마를 원해? 그럼 해주지! 가 목표였을까?” 설마.
이 작품이 박찬욱 감독을 홀린 지점은 짐작이 갔다. 모든 누아르의 마니아들은 르 카레가 다루고 있는 스파이물에 열광하니까. 누아르가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가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라면 냉전 시대의 스파이만큼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좋은 소재도 없다. <리틀 드러머 걸>의 찰리는 6개의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스파이란 서로 총구를 겨누고 피의 복수 룰 거듭하고 있는 양 집단에게 등거리로 가까운 자라는 것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일류의 스파이라면, 일류의 배우라면 말이다. 남을 속이는 가장 확실한 길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드라마 속에서는 찰리는 명배우답게 이스라엘 첩보팀에게도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에게도 진실한 감정을 보여주고 자신을 스파이로 만든 가디를 사랑하고 동침하며 자신이 애인 역할을 하고 있는 쌀림의 형이자 이 모든 쇼의 최종 목표인 칼릴과도 동침한다. 이 두 개의 순간에 찰리가 보여주는 태도와 감정은 비슷하다. 박찬욱 감독의 모든 영화 필모에 공통된 주제가 정체성 문제라고 한다면 가장 극단적인 정체성을 혼란 혹은 명배우의 성공적인 배역 소화를 보여주는 이 소설이 왜 감독을 유혹했는지는 짐작 가능하다.
냉전 시대가 낳은 가장 신기한 직업, 스파이. 스파이는 적을 자신만큼 자세하게 알고 이해하게 되는 직업이고 따라서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한다, 재능이 뛰어난 스파이/배우라면, 이 재능은 자신을 최고의 프로페셔널로 만들어주고 동시에 원래의 ‘자신’을 파괴할 것이다. 드라마와 소설의 결말은 다른데 과연 찰리는 자신을 파괴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의 인격을 주어 모아 봉합하는 데 성공한 것일까? 이스라엘 외교관을 습격한 테러에 대한 보복을 이토록 복잡하게 수행한 첩보팀 보스, 마틴에 대한 감독의 동일시는 뻔하면서도 귀여운 데가 있다. 극 중 몇 번이고 반복되는 대사, 디테일에 대한 강조는 박 감독의 입버릇이기도 하다.
박찬욱의 장기이자 그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감정적인 누아르 emotional noir, 인간사를 비스듬한 조감도로 보면서 가끔은 심술궂은 비웃음을 날리기도 하는 특이한 유머감각은 이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박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찍은 영화 <스토커>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모국어와 모국어가 아닌 작품이라는 것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영어라는 거울로 비추는 세상이 감독에게 그만큼의 거리감과 냉정함을 준 것일까?
* 리틀 드럼 보이는 전쟁이 일어나면 맨 앞에서 북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하는 북치는 소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