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6
-. 아이폰은 기자 시절의 로망이었다. 통화 녹취를 위해 갤럭시를 쓸 수밖에 없는 슬픈 직업… 퇴사 디데이를 달력에 적어놓고 그 날이 오면 분명 아이폰으로 갈아타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익숙함에 속아 구관이 명관이겠거니 스스로의 욕망을 억눌러 온 게 벌써 2년.
-. 그런 나를 각성시키기라도 하듯 4년째 억지로 목숨을 부지해 오던 갤럭시 S9이 이제는 제발 죽여달라며 자폭의 신호를 보내왔다. 사실 이렇게 고가의 전자기기라면 최소 10년은 쓸 수 있도록 만들어 놔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자동차처럼.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나마 옛 모델인 아이폰 12 미니를 구매.
-. 집에 앉아서 새로운 핸드폰을 개통시킬 수 있는 놀라운 세상이다. 대리점에 가지 않아서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좋은 점이 있다면, 시간에 쫓겨 그냥 기존 폰에 있는 연락처와 사진들을 무조건 그대로 옮겨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옛날 폰에서 새 폰으로 갈아타는 행위는 마치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 같은, 약간은 엄숙한 회고의 기회를 주었다(?).
-. 기자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한 기분은 분명 핸드폰 안에 넘쳐나는 연락처 개수 때문이었을 거다. 6년 하고 관둔 후 남은 것은 3800개에 가까운 전화번호였다. 한 번 스쳐도 그 얼마나 대단한 인연이겠냐마는, 그 번호들은 대개 껍데기이다. 대체 누구인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 반대로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것 같은 사람, 지금은 연락을 할 수 없는 사람, 술을 먹고서야 겨우 용기내서 전화 걸어볼까 말까 한 사람. 그 사람들의 유령같은 이름만 이고 진 채로, 용량이 부족하다는 핸드폰의 비명을 애써 무시한 채, 무겁고 미련하게 살았나 싶었다.
-. 조용히 앉아 연락처를 하나하나 넘겨다보는 일은 힘들지만 꽤 좋았다. 괜히 부끄러워지거나 다시 화가 나게 만드는 이름들도 보였다. 그 당시에는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던 일도 지금 보니 너무 아무 것도 아니어서 좀 웃겼다. 그렇게 지금 당장 전화해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들의 전화번호만 일일이 손으로 옮겨 담았다. 80개 정도의 번호만 남았다. 아 그리고 기자 일 하면서 어떻게 저떻게 알게 된 연예인이나 시인의 번호는 그대로 저장해뒀다. 그들은 쉽게 번호를 바꾸니 이미 다른 사람의 번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니깐 ㅎㅎ
-. 자동완성은 당황스럽고 페이지가 넘어가는 흐름도 적응이 어렵다. 하지만 일단 핸드폰이 작아서 마음이 편하다. 우리 가족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손이 작아서 나에겐 갤럭시 S9도 버거웠었다. 여러모로 가볍고 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