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
엊그저께 최근 나의 실패에 관한 글을 썼었다. 이번에는 그 좌절스러운 시간을 지나는 이야기를 한번 풀어볼까 한다.
1. 좌절 당일
나를 너무도 좋게 봐주고, 그 사이 많은 내부 상황들까지 공유해 주고, 중간중간 팁까지 줄 정도로 내게 호의적이었던 중국인 HR 매니저가 오후에 전화 한번 하겠다고 하였다. (나의 진솔하고 지나치게 캐주얼한 이 스타일은 탈락 사유가 된 임원 포스와는 거리가 멀게 만들지는 몰라도, 실무 레벨에 가까운 사람들을 나의 열정적인 지원군으로 빠르게 만드는 데에 커다란 강점을 가지고 있다.) 몇 시간 뒤에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촉이 왔다.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데 오후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뭔가 다른 일을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자.'
꽤나 오래 인터뷰 준비와 업계 전략 스터디에 올인을 하느라 뒷전이었던 집정리를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동요를 틀어놓고 쌓인 물건들을 정리하고 쓰레기들을 버렸다. 쓰레기와 함께 나의 기대감과 희망과 같은 것들을 같이 버렸다. 그러고 전화를 받았고, 이제는 더 이상 놀랍지는 않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차분히 혹시 추가적으로 다른 것을 더 내가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없는지 물어보고, 최대한의 피드백을 받아내기 위한 이러저러한 질문들을 했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끝까지 시간을 내어 많은 얘기들을 솔직히 해주고, 내게 추가 시간을 낭비 말라며 초 스피드로 전화까지 준 그녀에게 진심으로 여러 번 감사를 했다.
나의 머릿 속도 정리 할 겸, 기록도 할 겸, 근황 업데이트도 할 겸 링크드인과 페이스북, 그리고 브런치에 글을 썼다. (보통은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거의 같은 내용을 도배하지는 않는데, 그날은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저녁에 신랑이 사 온 치킨에다 한동안 손도 못 대고 오래 아껴둔 인디카 IPA 한 병을 깠다. 상당기간 절주의 힘이 그리도 큰 지 한 병으로도 충분히 알딸딸해진다. 아이랑 미키 마우스 단편을 몇 개 보면서 술이 깨기 시작하여, 아이가 잠들고 난 뒤부터는 한동안 확인하지 못했던 채용 공고들이 뭐가 있는지 다시 한번 훑어보고 나의 향후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러고 링크드인을 열었는데, 그 사이 조회수가 만 이상으로 폭발하고 역대급 반응을 일으킨 것을 발견했다. 십 수개의 댓글과 서른 명 이상의 일촌 신청을 일일이 대응하다 보니 새벽 두 시가 훌쩍 되었다. 역시 신상을 다 까는 그 동네에서는 ‘망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잘 팔린다.
2. 그다음 날
확실한 외향형인 나는 집에서 자숙과 힐링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갖기보다는 바로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집중적인 다각도의 준비 기간에 부산물처럼 득템 했던 티켓을 챙겨, 역대 최고 망작이라는 영화에 개봉 당일 조조로 시간을 낭비하면서 기분 전환을 했다. 끝나고는, 예전에 좋아했지만 요 근래 거의 먹지 못했던 메뉴를 내게 근사하게 대접하기로 했다. 강남역에서 평이 좋다는 이탈리안을 찾아 당당하게 혼자 왔다고 말하고는 크랩 로제 파스타에, 평소 잘 시키지도 않던 레몬 에이드까지 추가해서 아주 여유롭게 음미했다. 후식 아이스크림까지 야무지게 풀코스를 두둑이 먹고 나왔다.
소화 좀 시킬 겸 강남역 지하상가를 돌면서, 만원도 안 하는데 놀랍게도 맘에 드는 모자를 하나 사서 썼다. 올리브영과 교보 문고를 한 바퀴 하고는, 벼르고 있던 젤리 펜을 두 개나 손에 넣었다. 이제 배가 좀 꺼졌으니 마사지도 받을 수 있겠다. 재작년에 다회권을 끊어두고도 아직 다 못 써먹은 마사지샵에 전화했더니 다행히 한 자리가 가능했다. 하루 종일 운이 좋은 날이다. 어제 너무 못 자서 뻣뻣한 목과 어깨를 시원하게 풀고는, 참새 방앗간인 다이소에 들렀는데 아이가 좋아하는 미키, 미니 마우스 그림이 정식 라이선스로 박힌 유리컵이 정말 천 원이라니 탄복을 하며 오늘의 마지막 득템을 하였다. 정말 알차게 하루를 보내며 종일 걷기 운동도 했으니 잠도 잘 올 것이다.
3. 이틀 뒤
철저한 익명 속에서 온전히 컨텐츠로만 승부를 보는 브런치에서의 구독자수보다 적은 수의 일촌을 보유하고 있던 철저한 실명제 링크드인에서의 ‘망한 스토리’ 컨텐츠 파급력은 실로 놀라웠다. 여전히 일촌도 아닌 한 헤드헌터는 그 글을 봤다며 ‘나의 현재 고민에 도움이 될 만한 자리를 지금 추천해 줄 수 있다’며 연락이 왔다. 일촌이었는 지도 잘 몰랐던 한 분은 싱가포르에서 현재 임원 코칭 등을 하고 있는데 아무런 바라는 것 없이 도움을 주고 싶다며 글을 남겼다. 그 외에도 생각지도 못하던 십 수명이 지나가다 응원한다, 공유해 줘서 고맙다, 공감 간다와 같은 댓글들을 달아주었다. 일촌도 아니었고 굳이 신청을 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좋아요와 댓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도 흥미로웠다.
팬이 생길만한 곳에는 그만큼의 안티 역시 반드시 생긴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는 나는, 기대 이상의 폭발적인 반응을 보며 한편 그만큼 또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있을까 동시에 궁금해지기도 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널리 알려지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도 아니었고, 오히려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바로 몇 주 전에도 어떤 링크드인 탑 인플루언서 하나가 ‘솔직한 모습을 공유했더니 뒤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너무 많아 지친다’며 떠난다는 선언을 한 것도 본 터였다. 그런 부정적인 트래픽은 내가 통제를 할 수도 없고, 어디에나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생기면 정확히 그 이유로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것은 온오프 세계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내게 직접 얘기해서 문제를 해결할 용기도, 그럴만한 애정도 없는 사람들의 감정은 내 몫이 아니다. 그런 것을 신경 쓸 시간이 남는다면 차라리 내게 더 중요한 것에 에너지를 집중한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래서 나는 여태까지의 교훈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전략을 다시 재정비하는 데에 집중을 하였다. 그간에 고마웠고 꼭 기억하고 싶었던 헤드헌터들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컨텐츠화 하였고, 이 글이 또 노출될 오디언스들을 감안하여, 현재 매물로 나오게 된 나의 커리어를 기존 마케팅 전문가에서 마케팅은 기본이고 세일즈 경력 있는 비즈니스 드라이브 전문가로 리포지션 해서 셀링 하면서 마무리 지었다. 그 글을 보고 앞으로는 마케팅 총괄이 아닌 비즈니스 총괄 자리로 누군가 연락이 오기를 바라는 의도를 가지고. 갑자기 누군가는 마케팅하다 왜 갑자기 비즈니스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는 커리어 자체를 세일즈에서 시작해서 세일즈 및 중장기 비즈니스 전략에 상당한 경력이 있었다. 게다가 이후에도 온라인 직접 판매 실적을 일단위 관리 및 보고, 매 건마다 철저한 ROI 시뮬레이션과 결과 분석이 동반된 ‘관리의 끝판왕’ 조직에서도 살아남았던 이력이 있었다. 내게는 테마별로 엮을 수 있는 점들(connecting the dots)이 아직도 다양하게 있었다.
"당연히 CEO까지는 하셔야죠. 충분히 그러실 수 있고요." 만났던 수많은 헤드헌터들 중에서 내게 가장 크고 깊은 울림을 주었던 박 모 부사장님의 그 말씀은 아마 커리어 내내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렇게 아직도 나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의 좌절 모먼트는 한동안 한없이 쉬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빠르게 기분 전환한 뒤, 가진 장비들을 점검하고 다시 기어를 바꾸어가는 스토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