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본 적 있나요?
지난주 먼 친척분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90세가 넘으신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시고, 멀끔하시고, 유쾌하셨다. 다만 연세가 좀 느껴진다면, 겉으로 보기보다는 치아가 안 좋으셔서 모든 음식을 가위로 잘게 잘라서 드셔야 하는 정도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전히 경쾌하고 활기차게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었지만,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고 내 마음에 아직도 묵직하게 남아 있는 말이 있었다.
"난 이미 유통기한이 다했어.
내 주변에 친구들은 이제 정말 한 명도 안 남았고, 모두 다 이미 저 세상으로 갔지."
주변 누구보다 먼저 세상과 이별해야 하는 자의 아쉬움과 두려움도 크겠지만, 마지막으로 남아서 모든 사랑하는 이들을 보낼 때마다 느낄 슬픔과 고독함 역시 유쾌할 리 없는 감정일 것이다. 그것은 삶을 남보다 조금 더 많이 허락받은 자의 대가이자 숙명과도 같을 것이다. "인생에서 뭐든 딱 보통으로 하고 사는 것이 그리도 어렵다."는 아빠의 오랜 말이 여기서도 또 떠오른다.
이렇게 내 삶에도 유통기한이 있고, 나를 둘러싼 주변 관계들과도 물리적이건 감정적이건 유통기한이 분명히 있다. 우리는 대부분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모른 척하고 있지만, 모두 본능적으로는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순간에도 계속 늙고 있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을 때, 얼굴에서 주름이 보일 때,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아졌을 때 문득문득 늙어감을 느끼겠지만,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부속품들은 각기 다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어떤 특정한 부분을 많이 쓰게 되면 그 부분이 특히 더 빠른 속도로 닳게 되는 것도 너무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지만 간과하기 쉽다.
러닝을 오래도록 취미로 하고 있다는 사람과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겨우 삼십 초반이었음에도 십 년 정도 진심으로 하다 보니 나이에 비해서 관절이 빠르게 안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였다. 아니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하면 더 건강해지는 게 아니었냐고 했더니, 러닝을 많이 하면 한 만큼 하중을 지탱하는 관절에 더 많은 무리를 주어서 오히려 일반인보다 관절이 훨씬 빨리 닳는단다. 하긴, 예전에 의사 친구는 내시경을 많이 하는 내과 의사들은 40대부터 손목이 안 좋아진다며 미리 걱정을 했었다. 어제 안과 의사는 내게 만 43세가 되면 노안이 오는 게 너무 당연하고 정확하다며, 검사할 필요조차 없다고 한다.
우리의 수명이 90세, 100세가 된다고 하지만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의 수명이 똑같은 정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눈을 비롯한 많은 부분이 각기 다른 속도로 꺾이고 있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사용할 수 있는 우리의 부속품 별로 총 사용 가능한 시간이 유한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매 순간 인지한다면, 나의 소중한 눈을 인생에 도움도 안 되는 콘텐츠를 보는데 낭비할 것이 아니고, 멀쩡한 뇌를 불필요한 감정 소모하며 소진시킬 것이 아니고, 소중한 내 장기들을 쓰레기 같은 음식 정화시키는데 허비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 과학 기술로 인해서 인간의 어느 부속품이 좀 빨리 망가지더라도 적절히 교체해 가면서 오래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관절이 망가지면 인공 관절을, 귀의 성능이 약해지면 보청기를, 심장이 고장 나면 스탠트를 끼우는 등 수명이 다한 부품들을 교체 혹은 보조를 받으면서 삶을 큰 지장 없이 이어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 어떤 것이든 빌린 것이란 타고난 오리지널만큼 내 몸에 완벽할 수가 없다. 그러니 최대한 아껴 써서 감사히 타고난 것들을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보전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얼마 전에 아이가 좋아하는 로봇 박물관에 가서 도슨트 투어에 참여했는데, 첫 질문이 이것이었다.
"이 중에서 로봇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마네킹은 팔이, 어떤 것은 다리가, 어떤 것은 장기가 로봇 기계 부품이었고 마지막 것은 뇌가 기계였는데, 그 질문을 통해 인간과 로봇의 차이를 아이들에게 알려주려는 듯했다.
나는 순간 머리가 아득해지면서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인공 부품을 갈아 끼우지만 부분이라도 로봇이 되었다는 생각은 안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생각의 더 많은 부분을 인공지능과 인터넷에 외주를 주지만 우리가 로봇이 되었다고 생각할까? 내 뇌의 용량 제한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컴퓨터에 저장하면 그것이 로봇화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사고의 흐름을 AI에 물어서 전개하면 그것이 로봇화일까?
문득, 그 어떤 것으로도 '교체될 수 없는 나의 실체'라는 것은 삶의 순간순간을 내가 직접 느꼈던 감정, 그때 떠올랐던 생각들, 특별한 기억이나 냄새 같은 것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인간다움’을 더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더 자주 많은 순간을 더욱 격렬히 사랑하고, 더 기민하게 느끼고, 그런 느낌과 감정들을 날것 그대로 일일이 '직접' 쓰면서, ‘나의 실체’라는 것을 더 많이 캡처해 두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