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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족저비 Aug 19. 2019

서울 중앙지검의 ○○○ 수사관입니다.

보이스 피싱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010-XXXX-XXXX


화장실에서 급한 일을 처리하던 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몇 초 망설였지만 '나보다 더 급한 일 일지도 모르지'란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다.


나: "여보세요?"


수사관: "여보세요? 서울 중앙지검의 ○○○수사관입니다. ○○○(내 이름)씨 맞으신가요?"


나: "... 네"


대답을 하는 동시에 '씨발 뭐지? 내가 뭐 잘못했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화장실에서 급한 일을 처리하는 자세로 자아 성찰 시간을 가졌다. 그 순간 서점에서 파는 자아성찰 관련 책들은 다 쓸모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저 말 한마디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아 성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상황 판단을 미처 못한 순간 뜬금없는 질문이 들어왔다.


수사관: "41세 김용범 씨 아시나요?"


나: "아뇨. 모르는 사람인데 무슨 일이죠?"


수사관: "김용범 씨에 대해 물어본 이유는 김용범 씨를 금융 사기범으로 체포해서 수사 중인데 ○○○씨(내 이름) 명의의 대포 통장들을 발견했습니다. 범죄 연관성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물어본 거고요. 발견된 통장이 하나은행과 우리은행 두 개입니다. 우리은행 통장은 2019년 1월에 경기도 광명시 XX지사에서 만든 거 맞나요?"


나: "아니요."


'본인도 모르게 대포통장을 만들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좌를 은행 별, 용도 별로 모두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처음 경험하는 거라 불안을 느꼈다.


수사관: "저희가 ○○○씨(내 이름)를 현재 피의자로 조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조회해 보니 전과가 없어서 일단 피해자 신분으로 조사를 하고 있고요, 조사 방법으로는 직접 오셔서 받는 대면 수사와 전화상으로 녹취 수사가 있는데 무엇으로 받으시겠어요?"


신분이 언제든 피해자에서 피의자로 전활 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한다.


나: "두 가지 방법 중에 뭐가 더 좋은가요?"


늘 가성비를 따져온 습관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물건을 사듯 물어보았다.


수사관: "어... 더 좋고 그런 건 없고요. 편하신 데로 하면 됩니다. 보통 직장 다니셔서 직접 조사받기 어려우니까 전화로 많이 하시죠."


나: "아, 제가 지금 일을 안 하고 있어서요. 직접 가서 조사받을게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서울 중앙지검이 어디 있죠?"


수사관: "......" "서초동에 있어요. 그럼 직접 조사받겠다는 거죠? 수사 일정 잡아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나: "네. 알겠습니다."


순간 정적에서 '무식한 새끼 서울 중앙지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나?' 무시받은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전화를 끊었고, 화장실에서 처리 중이었던 급한 일도 끊어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 010으로 시작하는 개인 전화번호로 연락이 온 점. 내가 수사관이라면 사무실 유선 전화를 사용했을 것이다.

둘째. 나는 KEB하나은행을 사용하지 않는다. 계좌가 없는데 내 명의의 통장이 발견됐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여기서 의심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무시하자' 혹은 '확인해서 신고하자'

그리고 나는 후자였다.


영화 '시라노 연애 조작단'에서 '후자'는 '센 놈'이라 했는데 나는 센 놈이라 후자인 것은 아니다. 20대 시절 친구가 중고나라 거래 사기당하는 것을 보며 후자가 됐다. (중고나라 사기 거래는 가짜 안전거래 사이트 링크로 유인하는데 보이스 피싱과 거의 유사하다)


친구는 사기를 알아챈 순간 피의자의 아이디 및 카톡 기록을 캡처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사후 대처를 잘했지만 피해는 막지 못했다. 몇 달 뒤 범인이 체포되어 형사 처벌받았다는 통보를 받았음에도 피해 금액 130만 원은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기 치려고 마음먹은 사람의 범죄 대상이 된다면 이를 피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이것은 마치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 만나 한 사람이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거짓말할 때 그것을 듣는 사람이 거짓을 알아차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나는 친구에게 네 탓이 아니라며 위로했지만 친구는 '내가 더 신중했더라면', '그 돈으로 다른 것을 했다면' 이런 자책감과 기회비용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사기 피해자는 정신적 충격 → 신고 절차를 밟는 수고  긴 기다림  범인을 잡아도 금액을 보상받지 못하는 과정을 겪는다. 그래서 나는 후자(신고하는 유형의 사람)가 되기로 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의심을 확인하고자 구글에서 "수사관 + 대포통장" 키워드 검색을 했다.

놀랍게도 이 수법은 무려 5년 전 것이었다.


이제 보이스 피싱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하지만 신고를 하려면 통화가 피싱이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필요했다. 누군가는 '피싱 맞는 거 같은데 굳이 확인을 해야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이 말한 대면 조사나 녹취 조사로는 실익(금전적 이득)이 없다는 부분 때문에 확인이 필요했다.


여기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번째 의심 점인 하나은행 계좌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나은행 고객센터에 전화하니 유선 상으로 확인이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귀찮았지만 인근 하나은행에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나를 응대한 창구 직원은 신입 배지를 달고 있었는데 '보이스 피싱' 단어를 듣자마자 뒤에 계신 부장급 직원에게 보고했고, 부장급 직원분이 오셔서 직접 응대를 해주셨다.


부장급 직원분은 피싱 피해가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셨다. (직접 출금이나 링크로 들어가서 개인정보를 눌렀는지) 피해 사실이 없다는 것을 듣고는 안심하시며 계좌 유무를 확인해주셨다.


계좌는 당연히 없었으며 직원분은 정말 잘 오셨다며 칭찬해 주셨다. 피싱 사기범들은 출금 절차에 들어가면 은행도 연루돼있으니 은행 직원과 접촉하지 말라고 한단다. (이 말은 상식을 벗어나지만 금융기관보다 사법기관이 더 믿을 만하다는 심리가 작용하는 듯하다)


이제 신고절차가 남았다. 나는 금감원에 신고해야 하는지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직원 분은 피해 사실이 없다면 굳이 신고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전화 한 통 때문에 시간을 낭비를 했고 신고하지 않을 경우 다른 사람이 피해볼 수 있어서 꼭 신고하고 싶었다. 먼저 금감원(1332)에 전화했다. 놀랍게도 대기인원이 많아 몇 차례 시도에도 상담사와 연결할 수 없었다. 금감원은 보이스 피싱 피해를 입은 사람이 거는 신고 번호이므로 피싱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경찰(112)에 전화했다. 경찰은 내가 '수사관'이란 말을 꺼내자마자


"010 번호로 전화 온 거죠? 저희는 수사 과정에서 출석이 필요한 경우 기본적으로 서면 요청을 하기 때문에 그런 전화는 다 보이스 피싱입니."


라고 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수사를 항상 서면으로만 진행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급할 땐 유선 전화(02로 시작하는 번호)도 사용하며, 사건이 파출소까지 이관된 경우 개인 번호도 사용한다. 즉 경찰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적어도 '중앙지검에서 직접적으로 연락할 일'은 없다는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신고를 원한다고 했다.


"신고는 내방 및 서류 접수가 원칙입니다. 혹시 신고가 아니라 해당 전화번호 제보를 원하시는 건가요?"


신고와 제보가 다르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자


"그 번호는 070 인터넷 전화번호를 010으로 변작한 것이어서 제보하셔도 추적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피해 사실이 없다면 수신 차단 설정만 하시면 됩니다."


라는 답변을 받았다. 결국 은행 직원의 말이 맞았다. 그렇게 보이스피싱 사건은 2시간이라는 내 시간을 뺏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수사 일정을 잡아 알려주겠다는 그 가짜 수사관에게서 2차 연락이 오지 않았다. 왜 일까? 돌이켜보니 내가 이런 말을 했었다.


"제가 지금 일을 안 하고 있어서요."


그렇다. 나는 피싱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은연중 밝힌 것이다. 피싱을 안 당한 게 아니라, 못 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았다. 서울 중앙지검의 수사관이었다.


수사관: "여보세요? 서울 중앙지검의 수사관 ○○○입니다. ○○○씨..."

나: "하아..."


나도 모르게 깊은 한 숨이 나왔다.

그리곤 조용히 전화를 끊다.





+ 2020. 11. 08.


한동안 브런치를 잊고 살았는데 이 글의 조회수가 높아진 것 같아 알아보니,

나무위키 '전기통신금융사기' 문서에 제 글이 링크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링크를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위키 Link]

https://namu.wiki/w/%EC%A0%84%EA%B8%B0%ED%86%B5%EC%8B%A0%EA%B8%88%EC%9C%B5%EC%82%AC%EA%B8%B0?from=%EB%B3%B4%EC%9D%B4%EC%8A%A4%20%ED%94%BC%EC%8B%B1#s-4.1


상기한 내용은 제가 실제로 겪은 것이며, 이를 브런치에 게시한 목적은 누군가가 저와 같은 상황에서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최근 조회수가 6000건을 넘었다는 알림을 보며, '6천 명은 피해를 입지 않았겠지...' 스스로 위안 삼았습니다.


추가로 나무위키 문서를 참고하여 글의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이유는 '피의자를 조롱하거나 비난할 경우 2차 피해(예: 배달 폭탄)를 당하기도 한다'를 반영하여 독자를 위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인지 못하셨겠지만 이 글에는 부제목이 있습니다.

바로 '보이스 피싱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글의 마지막처럼 '조용히 전화를 끊는다'입니다. 저는 이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잘못한 일이 없다면(즉 피의자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어떤 잘못에 연관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주장(사실이 아닌 주장)한들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뭔 개소리야?' 하면서요.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정말 급하고 필요하면 다시 연락하게 되어있다는 거죠. 따라서 위에 언급한 개소리 사실 가정해도 저는 '최종 경고 형태의 서면' 또는 '영장 발부로 인한 강제조사' 때까지 그 일을 신경 쓰지 않을(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더 진행될 경우 '공식적인 절차'를 밟으면 됩니다. '링크로 접속', '전산상으로'가 아니라 날짜 잡고 직접 출두해서 떳떳하게 해명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일이죠.


그러니 위법행위를 한 적이 없다면, 절대 겁먹지 마시고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황하는 순간 이미 당한 것입니다.


부디 보이스피싱당하는 일이 없길 바라며.


#수사관 #검사 #중앙지검 #지방검찰청 #중고나라 #보이스피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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