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변호사 Feb 26. 2024

마르크스 묘지에서

런던, 2016년 9월 30일

[런던 하이게이트 마르크스 묘지]

런던 북부에 위치한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명하며, 열렬한 추종자들과 극렬한 반대자들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는 철학자이자 사상가 칼 마르크스의 묘가 있다. 마르크스의 지적 작업은 현실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적 원천이었고, 니체, 프로이트와 더불어 '회의의 세 대가'라 불리며 현대철학에 마르지 않는 사상적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부닥칠 때마다 마르크스라는 저 위대한 이름은 언제나 소환되는데, 사실 저 이름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자본주의 세계를 항상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유령처럼.


마르크스의 거대한 두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념비의 상단에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인 "WORKERS OF ALL LANDS UNITE"(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새겨져 있고, 하단에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중 마지막 테제인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가 새겨져 있다. 마르크스가 남긴 수많은 명문 중에서 저 둘이 선택된 것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세계 변혁의 수단은 노동자의 단결이라는 것 아닐까.


 

마르크스의 묘 맞은편에는 사회진화론자인 허버트 스펜서의 묘가 있었다. '적자생존'이라는 저 악명 높은 말을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회진화론이 인종의 우열을 전제로 제국주의적 지배의 이론적 정당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마르크스 묘 맞은편에 허버트 스펜서의 묘가 있는 것은 다소 기이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허버트 스펜서를 기억하는 사람보다는 마르크스를 기억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겠지만, 사회진화론적 생각은 인간의 마음속에 쉽게 침투하여 독버섯처럼 자라기가 쉽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꼭 마르크스의 묘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더라도 하이게이트 묘지는 한 번쯤 가 볼 만한 곳이었다. 공동묘지 특유의 으스스함은 있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고양이의 눈을 보면, 저 생명체에는 뭔가 신묘함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묘지 한가운데 저렇게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고양이에게서는 뭔가 좀 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어쩌면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고양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대놓고 죽음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죽음에 저항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따라서 우리는 그저 죽음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니까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다소 갑작스러운 결론이기는 하지만,) 그러니 우리는 되도록 즐겁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순종한다고 해서 죽음이 거느리고 있는 쓸쓸함이 덜 해지는 것은 아니다. 날이 밝아서, 해가 너무 좋은 날이라서, 덩굴이 감싸고 있는 비석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all photos by SAVINA

매거진의 이전글 프로이트 뮤지엄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