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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Jan 03. 2025

삶을 가꾸는 일이 윤리를 앞설 수는 없다

2025년 1월 3일

북부지법 가는 지하철 안에서 어제에 이어 서동욱 선생의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를 읽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지하철만큼 책읽기 좋은 곳도 없을 것이다. 물론 지하철 안에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소음은 있다. 그러나 그 소음은 카페의 소음과는 달리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다. 카페의 소음은 언어적 소음이다. 사람의 말이 만들어내는 소음이란 얘기다. 게다가 카페에 오는 사람들은 대화를 하기 위해 온 것이므로, 그 언어적 소음은 상당히 적극적인 양상까지 보인다. 그래서 카페의 언어적 소음은 독서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사고에 끼어들어 사고의 흐름을 방해한다. 그런데 지하철 전동차의 소음, 즉 비언어적 소음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사고의 흐름 자체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지하철에서도 대화소리나 통화소리가 있기는 하지만 지하철 고유의 비언어적 소음이 그와 같은 언어적 소음을 오히려 적절히 차단해 준다. 


서동욱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절실히 느낀 점 한 가지. 읽어야 할 책이 다소 어렵다고 하더라도 해설서나 요약서가 아니라 그 책 자체를 직접 읽어야 한다는 것. 가령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내용이 알고 싶다면, <법철학>에 대한 해설서나 논문을 읽어도 어느 정도는 그 내용을 알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해설서에는 헤겔이 <법철학>에서 얘기하고 풍부한 이야기들, 말 그대로 책의 핵심 사상과는 별로 연관 없어 보이는 풍부한 이야기들을 알 수가 없게 된다. 해설서를 읽는 것은 살을 뜯지 못하고 뼈만 핥는 셈이 되는 것이다. 서동욱 선생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감탄하게 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아니 많은데(두 페이지에 한 번은 감탄이다!), 대체로 내가 특정 고전의 핵심 내용(뼈)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전혀 무관한 부분(살)을 전혀 예상치 못한 맥락에서 인용/배치하면서 의미를 재창조하는 부분들이다. 서동욱 선생의 글의 비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그 스티븐슨)의 단편 <하룻밤의 유숙>을 읽었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다. 프랑수아 비용이라는 시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이 죄인에게는 지금도 계속되는 괴로운 기억의 반복을 멈출 치료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치료받아서는 안 된다. 책임지지 못한 사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치료란 있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삶을 가꾸는 일이 윤리를 앞설 수는 없다.
(서동욱,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83쪽)


피해자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가해자의 삶이 망가지더라도, 피해자가 있는 이상, 가해자는 면책될 수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소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반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윤리란 그만큼 엄중한 것일까? 


 



아내가 건강을 회복했다. 약이 좋은 것인지 시간이 약인 것인지. 다행이다. 2025년에는 아픈 날이 줄어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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