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10월 일본 여행 숙소 어디로 할까?"
"12월에 OO이랑은 어디로 갈거야?"
"내년 4월 여행 숙소는?"
"그 다음 7월은 어떤 루트로 여행 할 거야?"
최근 몇 주간 나에게는 일종의 강박이 생겼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부여한 강박이기도 했고, 아내의 은근한 압력이기도 했다. 그것은 '여행 계획 수립'이라는 이름의 강박.
비행기 티켓은 이미 내년까지 발권을 끝내놓았었다. 각 여행 간에 고작 2-3개월 밖에 안되는 텀을 두고, 나는 무작정 발권부터 해놓았던 것이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못 갔던 여행에 마치 보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비행기 티켓의 발권을 서둘러 끝내놓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다가오는 여행 일정에 점점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다. 10월 여행을 고민하다, 어느새 12월 여행으로 건너 갔고, 그러다 4월 여행, 7월 여행으로 널 뛰듯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여행 준비가 뭐 하나 제대로 될 수가 있나.
결국 비행기 티켓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시간만 하릴 없이 흘러 갔다. 정신 차리고 보니, 10월 여행이 고작 1달 반 정도 밖에 안남은 시점이었다. 우리 부부의 여행에서 숙소 예약은 항상 내 역할이었다 보니, 아내는 그런 내가 적지 않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게다가 한껏 본인이 알아 보고 정보들을 전달해 주었는데도 계속 밍기적 거리고 있으니 뭐라 한소리가 터져 나오기 직전처럼 느껴졌다.
더 늦기 전에 첫 번째 여행 계획을 마무리 해야 했다. 그런데 아뿔싸. 이유 없이 내 몸이 이상 증상을 보였다. 열이 갑자기 나기 시작하더니 장염, 그리고 다시 열, 두통으로 이어졌다. 그러더니 이번엔 아이가 아팠다. 39도가 넘는 고열이 일주일 동안 반복되다가, 지난 금요일 밤에 찾은 응급실에서 마침내 '마이코 플라즈마 폐렴' 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 와중에 여행 계획을 해야 했으니, 정신은 비몽사몽, 마음은 무거운 상태에서 하루 종일 휴대폰만 들여다보게 되었다. 엎친데 겹친격으로 회사에서 자꾸만 사고가 터지니, 마음만 조급해져갔다.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이제 여행 계획이 얼추 마무리가 되가고 있다는 점. 여러 여정의 숙소를 예약 하는 과정에서 예약이 꼬여서, 10분을 넘게 기다려도 연결되지 않는 아고다 고객센터와 씨름하는 일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원하는 대로 예약을 완료했다.
여행 계획을 마치 밀린 숙제처럼 한 기분. 여행 준비라는 게 과정이 즐거운 법인데, 이번엔 조금 고통의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어깨의 짐은 확실히 가벼워졌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당분간은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물론 내년 여행 계획이 완료되지 않았으니 이대로 마음 놓고 있다가는 또 다시 여행 숙제를 해야 할 수 있으니 방심은 금물이다.
내가 이처럼 여행 숙제 하느라 몇주를 고통 받는 동안, 아이는 그런 아빠에게 매일 같이 외쳐댔다.
"아빠!! 여행 놀이 하자!"
내가 매일 같이 집 안에서 커다란 지구본을 옆구리에 끼고, 빙글빙글 돌려보며 여행 계획 짜는 모습을 계속 해서 본 터였다. 휴대폰과 노트북으론 지도와 블로그, 챗GPT를 띄워 놓고 여행지를 검색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본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빠 놀이하자!"라고 외치면, "우리 내년에 여행 어디로 갈지 같이 고민해보자. 넌 어디로 가고 싶어?" 하고 계속 주제를 몰아가서 그런 것일까.
아이는 각혈하듯이 반복되는 기침과 함께 몸이 아픈 와중에, 눈을 간신히 뜨면서도 외쳤다.
"아빠!! 여행 놀이 하자!!"
집안의 모든 인형과 캐리어를 총 출동 시켜 한 쪽에 쌓아두고선, 이것을 "공항 버스와 비행기에 짐을 실은 거야"라고 말했다.
아들아, 넌 내 아들이 맞구나. 우리 즐겁게 여행 다녀오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