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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Jul 19. 2024

결핍의 역사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아주 엄한 분이셨다. 당시에는 훈육을 목적으로 체벌이 허용되던 시절이기도 했고, 원체 엄하시기도 해서 맞기도 자주 맞았다. 한 번은 힙합바지가 너무 입고 싶어서 밀리오레에서 힙합 바지를 사 왔는데 아버지가 가위로 다 잘라버린 적도 있었다. 이러저러한 사건으로 인해 너무 서러웠던 어느 날, 나도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라며 아버지께 처음으로 울먹하며 대들었던 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 뒤로 아버지는 그렇게 엄한 모습을 보이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친구처럼 지냈다. 대학교 시절 아버지와 단 둘이 2년 정도를 같이 살게 되었는데, 그냥 룸메이트와 사는 수준을 넘어서서 아버지가 나를 모시고 사는 수준이었다. 그러면서 왜 그렇게 엄하게 우리를 키우셨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매우 인자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집안의 맏이였고 할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은, 동생들 앞에서도 매우 권위적인 형이자 오빠였다. 집안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세상의 중심으로 살아가던 아버지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갖은 모욕과 상처되는 말들에 마음을 많이 다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시절이 매우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심한 것이, 우리들은 이런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를 더 험하게, 더 엄격하게, 오냐오냐하지 않고 키웠다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기강이 잡힌 가정에서 자랄 수 있었다. 물론 좀 엄하고 체벌이 병행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고, 덕분에 나는 또 엄격하고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탓에 또 그에 맞는 어려움을 갖게 되었다.


내가 겪은 경험과 그로 인한 감정, 그래서 생겨난 생각과 결심으로 인한 행동들은 늘 럭비공과 같다. 한쪽으로 치우친 공을 살짝 건드리면 공은 중심으로 가기보단 반대쪽 끝으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공을 건드려 가운데로 보내려고 할수록 공의 움직임은 점점 더 불규칙해지고 극단적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내가 의도한 만큼 무언가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그리하여 권위적이고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란 나는 또 내 자식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런 고민 앞에서 숙연해진다. 조금 더 자유롭게 친구 같은 부모로 키울거라는 대답을 도저히 내릴 수가 없다. 그럼 또 럭비공 같이 아이는 어떤 방향으로 얼마만큼 튀어버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그것이다. 결핍의 역사를 끊는 것.


내가 아이에게 투영하는 바람은 사실 대부분이 나의 결핍에 기반하고 있다. 어릴 적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가 되어 그 반대를 희망한다. 만약 돈이 없어서 고생한 자녀들은 자식들은 돈 걱정을 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또 다른 결핍을 유발한다. 수평적인 관계에서 자란 아이들은 사회의 권위 앞에서 쉽게 상처받을 것이며, 돈 걱정 없이 자란 아이들은 경제관념이 없어 힘들게 살게 될 것이다.


자식이 어떠한 방향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또 그걸 위해 자식에게 무언가 해주는 것은 그 내용을 떠나 사실 결핍을 물려주는 행위이다. 내 삶을 만족하지 않는 부정적 인식에 더해 특정한 가치를 옳다고 여기는 편협된 시각까지를 패키지로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는 어떤 방식으로 자랐든 간에 스스로의 삶에서 결핍을 느끼고 또 다른 왜곡된 욕구를 지니게 된다.


결핍의 역사를 끊는 것은 곧 내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는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랐고, 많이 맞으면서 자랐지만, 덕분에 조직 생활에 있어서 최소한의 선을 지키면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예의와 눈치를 갖게 되었고 이는 나에게 큰 경쟁력이다. 나는 돈 걱정 없이 자라서 경제관념은 없지만, 덕분에 세상에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배울 수 있었다.


이렇게 내 삶에 대해 긍정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없어진다. 나처럼 자라도 좋고, 혹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 자라도 좋다. 다만 주어진 삶을 늘 감사해하고, 삶의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을 더 즐기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가질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아이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나부터가 행복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내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결핍을 끊어내야 한다. 처음부터 결핍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아이가 느끼고 배우는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를 주려고 하기보다, 나 스스로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아이는 그런 나를 따라 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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