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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해주 Nov 05. 2022

#3. 복숭아가 맵게 물들 때

-세상에 나랑 맞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오늘의 레시피]


복숭아고추장


**재료 (다섯 근 기준)

복숭아 :  많이 (한없이 많이 들어간다는 엄마의 전언... 대략 50개 정도?)

고춧가루 : 엿기름과 복숭아 기준에 맞춰서

엿기름 : 복숭아랑 비슷하게

메주가루 : 복숭아랑 엿기름의 기준


**소요시간 : 꼬박 이틀


후식

                                        #사과

                                        #외할머니가 방앗간에서 직접 갈아온 서리태 미숫가루

봄에 핀 복숭아꽃

"딸! 복숭아 고추장 만들었어."


복숭아고추장...? 복숭아가 어떻게 고추장이 되지? 이게 맛 조합이 가능한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들이 머리속에 날아다닐 때였다.


"엄마도 처음 만들어봤는데, 진짜 맛있네~. 고추장에서 복숭아 달큰한 향도 나."

"복숭아로 어떻게 고추장 만들 생각을 했어?"


엄마의 말은 이랬다. 과수원 농사 끝에 상품성이 없어 팔지 못한 복숭아들을 버리기가 아까워 고심하다가 '퓨전' 고추장을 만든 거라고. (우리 엄마 음식 솜씨는 좀 뛰어난 편이다. 응용도 잘해서 주변에서도 엄마 음식은 인기가 많다.)


"주변에서도 난리났어 지금. 맛보기로 조금씩 나눠줬는데, 맛있다면서 더 만들어서 팔라고 그러더라."


오호. 그 정도라 이거지? 맛이 너무 궁금해졌다.


"근데, 그거 만들기 안 힘들어?"

"왜 안 힘들어~. 이거 만들려면 꼬박 이틀 걸려."

"이틀이나 걸린다고? 일반 고추장보다는 쉬운 거 아니었어?"

"이런 따님을 보았나. 잘 들어봐."


엄마의 복숭아고추장 만들기 일장연설이 시작됐다.

1. 복숭아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서 먹기 좋게 자른다.

2. 설탕(or 물엿)에 잰다.

3. 단 물이 잘 든 복숭아를 팔팔 끓인다. 푹 익을 때까지. (물은 한 방울도 넣지 않아야 한다.)

4. 익은 복숭아를 믹서에 간다.

5. 잘 간 복숭아를 엿기름과 섞어서 약한 불에서 다시 끓인다.

6. 5번의 재료를 식힌다. (식히는 데만 꼬박 하루가 소요된다.)

7. 6번의 재료에 메주가루, 고춧가루를 넣고 치댄다. (치대는 게 또 꼬박 하루다.)


이러면 복숭아고추장이 된다.

복숭아는 안 보이지만, 분명 복숭아가 들어가 있다.

여튼 이렇게 엄마의 정성과 노력으로 만든 고추장과 첫 대면식. 살짝 맛을 보니 고추장인 듯 고추장 아닌, 복숭아인 듯 복숭아 같은 맛이었다. 적당히 매콤하면서 맛깔스럽게 달큰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들의 연합 작전이었다. 그야말로 퓨전.

여기에는 무조건 비빔밥이지. 뜨근한 밥에 무생채를 넣고 들기름을 훠이 두른 다음 계란프라이를 얹어 석석 비벼서 재빨리 한 입 꿀꺽 삼켰다.

일반 고추장에서 느낄 수 없는 풍미가 화악 올라왔다. 뭐랄까. 순하게 다른 재료들과 섞이면서도 복숭아고추장 그 자체의 맛은 극한으로 살렸다고 해야 하나. (우리 엄만 정말 대단하다. 엄지척)

이 고추장에서 겸손함을 느꼈다고 한다면 좀 오버인가 싶지만, 그 정도의 맛이라 사실 좀 놀랐다.


퓨전은 말 그대로 전혀 다른 재료들을 조합해 그것들이 가진 최대의 장점을 살려 완성한 요리다. 아주 엉뚱한 식재료들끼리의 하모니랄까.

그렇다보니 서로가 부딪치는 맛과 향의 지점에서, 어느 정도 적절히 양보도 하고 품어 안기도 해야 하는 것. 그래야 한 그릇 안에서 제대로 된 맛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사람의 인생,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 진짜 마음에 안 들어."

" 인간 얄미워서   쥐어박고 싶어."


나의 하루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을 향해 느끼는 마음이다. 순간순간 밉상이고 얄미운 상대의 칫솔을 변기에 씻어대는 상상을 할 정도로.

그런데 세상에 나와 맞는 사람은 대체 몇이나 될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다. 왜냐고? 두 가지 질문을 해보겠다.

1. 나는 내가, 하루에 몇 번이나 마음에 들까?

2. 혹시 마음에 안 든다면,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할까?


나는 내 자신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참 많다. 하물며 남이다. 내 자신도 하루에 수십 번, 혹은 시시때때로 마음에 안 드는데, 남이 나한테 뭐 얼마나 마음에 들까.

이따금 주변 친구들이 나를 대하는 말 중에 부담스럽고 싫은 것이 하나 있다.


"해주는 참 한결 같아."

"힘들 때 꼭 찾을 수 있는 사람이야 넌~."


사실 굉장히 좋은 칭찬이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계속 듣다 보면 왠지 가스라이팅이 되는 것처럼, 어느샌가 나는 '그래야만'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그래서 가끔 자조 섞인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나란 사람에게 관심이 있을까?'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녹아들고 싶다면,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내어줄 줄도 알아야 한다. 내 것은 꼭 쥐고 놓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하는 것, 이걸 두고 '날도둑x 심보' 라고 한다.

날도둑이 되지 말자. 그 사람의 좋은 것과 나의 좋은 것을 잘 뭉쳐보자. 복숭아가 자신의 가장 좋은 향과 달큰한 맛을 내어주고 맵게 물들어가는 것처럼.

전혀 받아들이기 어려운 복숭아의 맛을 엿기름이 섞여 들어가고, 고춧가루와 메주가루가 보태어 받아들이는 것처럼.


퓨전 음식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겸손이 아닐까. 자신의 장점만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의 장점은 부각시키면서도 단점은 최대한 끌어안는 힘.

팀워크의 끝판왕이 아닐까 싶다.

오늘쯤은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는 하루이면 어떨는지.

혹시 내 필요에 의해서만 찾는 상대가 있지 않은지, 혹은 내가 더 잘나보이고 싶은 욕심에 상대를 깎아내리는 시간은 아니었는지. "이번주에 밥 한 번 먹자." 누군가 먼저 전해온 따뜻한 말에, "글쎄, 시간 한번 보고." 차갑게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힘들 때 말고, 필요할 때 말고, 평소에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쓰다만 시간 말고, 기꺼이 내 시간을 내주는 사이.

그렇게 겸손하고 우아한 인연들이 많아지기를 이 시간 잠잠히 기대해본다.



[복숭아고추장 일러두기]


1. 도전하고 싶은 분들은 연차나 월차를 일단 회사에 내기 바란다. 이틀이나 붙어있어야 하니까.

2. 복숭아는 여름 과일이다. 그러므로 제철 복숭아를 구입해서 만드는 걸 추천한다. 맛이 정말 제대로다.

3. 재료를 무작정 많이 보태고 섞는다고 해서 맛이 좋아지는 게 아니다. 양에 맞춰 적절한 비율로 만들어야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다.

4. 일단 만들어두면 웬만한 재료에 다 잘 어울린다. (예 : 비빔밥, 쭈꾸미볶음, 제육볶음, 김치찌개, 닭볶음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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