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핸드폰 진동이 요란히도 울려댄다. 발신자 [우리엄마]. 초저녁부터 잠에 빠져 있을 우리 엄마가 이 시간에 웬일인가, 싶어 얼른 전활 받았다.
“엄마?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어 딸! 어, 그게... 내가 뭔 말 하려고 전활 했더라...”
“뭐?”
“아니, 내가 꼭 물어볼 게 있어서 급하게 전화한 건데. 전화하는 그새 까먹었네... 아휴. 이놈의 정신머리 좀 봐. 생각나면 다시 전화할게. 얼른 자.”
달깍. 엄만 그렇게 전활 끊어버렸다. 예상컨대 엄마가 같은 이유로 내게 다시 전활 걸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계속해서 기억이 나지 않을 테니까.
우리 엄만 지독한 건망증 환자다. 뭘 그리 깜빡깜빡할 게 많고, 툭하면 잊어버리고 생각 안 나는 게 많은지. 이걸 지적할 때마다 엄만 “너도 늙어봐라 이년아.”라고 하지만 꼭 나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늙어서 그렇다.”라고 말을 할 땐, “그럼 메모를 하면 되잖아. 중요한 걸 까먹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고 되받아친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엄마는 꾹꾹 누른 분노의 한마디를 꺼내놓는다.
“야! 메모해도 잊어 이년아! 늙는 것도 서러워죽겠는데, 딸년이란 게 위로는 못할망정 자꾸 지 엄마한테 지적 질이야.”
이쯤 되면 나는 입을 다문다. 엄마의 화를 자극해봤자 내게 좋을 게 단 한 가지도 없으므로.
엄마는 그때의 내 말이 어쩐지 좀 서럽기도 하고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또 어쩐지 자꾸만 퇴화해가는 자신의 변화가 꼴 보기 싫었던 건지. 어느 날 간 시골집 주방 벽면에 메모가 빼곡히 적힌 화이트보드가 걸려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엄마의 메모장이 된 화이트보드엔 복숭아며 포도 주문 상태와 날짜별로 나갈 택배 개수며 그날그날 필요한 포장 재료들, 그리고 장을 봐야할 목록까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엄마의 글씨로 채워진 화이트보드를 보고 있자니 이걸 생각 못하고 엄마한테 그동안 ‘지적 질’만 해댄 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엄마, 이거 나한테 사달라고 하지. 언제 이런 걸 생각해냈대?”
“이제 안 쓰면 진짜 자꾸 까먹어서 실수하고 그러니까. 전화한 데에다 또 전화해서 물어보고 또 전화하고. 아휴. 정말 짜증스러워서 하나 샀어. 근데 그거 있으니까 좋아.”
엄마는 자신의 건망증에 대안이 생겼단 사실이 못내 기쁜 듯 보였다. 그런 엄말 보고 있자니 짓궂은 생각이 하나 들었다.
“엄마, 그럼 여기다 그런 것도 하나 써 놔라. 딸년한테 못되게 굴었던 거. 뭐 이런 거 있잖아? 반성의 의미로다가.”
내 말에 엄마가 나를 흘겨보며,
“저것이 엄말 놀려. 야! 그리고 내가 또 뭘 얼마나 너한테 잘못했다고 그러냐?”
나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짜 기억 안 나?”
엄마는 지금 저 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며칠 전. 외할머니와 심하게 싸운 엄마는 내게 전활 걸어 한참을 씩씩대며 화를 토해냈다. 대략의 요지는 이랬다. 할머니는 엄마와 싸우다 화가 폭발할 때면 이따금씩 거친 언어들, 이를 테면 욕도 서슴지 않고 하더란 것과 엄말 세상 제일 나쁜 딸로 몰아간다는 것, 그리고 노인네가 갈수록 억장만 늘어간다며, 마침내 이 모든 것이 억울하고 분통터져 죽겠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적어도 말이야! 내 딸한테 그런 말은 안 해!”
뭐라고?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엄만 아주 확신에 찬 어조로 내게 다시 한번 그 말을 새겼다.
“어떻게 딸한테 그런 심한 말을 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렇게 20여분 쯤 지나 엄마의 화가 사그라들었을 때쯤 나는 물었다.
“엄마 근데...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뭐가?”
“엄마가 아까 한 말 말이야. 엄마는 적어도 딸한테 욕하고 심하게 안 한다고.”
“그랬지. 그게 왜?”
그게 왜냐고 묻는 엄마의 말에 나는 그만 헛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우리 엄만 나와 싸울 때마다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는 건 기본이었고, 화를 못 이겨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이따금씩 정말 못내 감정이 폭발이라도 하는 날엔 서슴없이 딸년에게 이런 욕, 저런 욕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저기 엄마. 엄마 말야. 나한테 욕 많이 했어. 열 받으면 심한 말도 서슴지 않고 많~이 했더랬어.”
잠깐의 침묵. 엄마가 당황한 게 분명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엄마가 말했다.
“야... 내가 또 언제...”
“음...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나는 내 기억 속에 있는 엄마의 말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확인시켜주는 작업들을 해나갔다. 쭉 내 말을 듣고 있던 엄마가 말했다.
“진짜 내가 그랬나? 왜 난 기억이 안 나지?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 근데 너, 그걸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얘기가 나오니까. 나도 누구 딸이어서 정말정말 엄마의 지금 심정을 잘 아는데, 그게 그 당시엔 대박 억울하고 죽을 것 같아도 또 지나면 그게 꼭 미쳐죽을 일도 아니더라고.”
여기까지 들은 엄마는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하는 말,
“야 그런 건 잊어~ 좋은 것도 아닌데 뭘 다 기억하고 살어. 할머니 말마따나 (할머니 말을 흉내내며) 스뜨레뜨 받게. 정신 건강에 해로워.”
그렇게 말하고선 또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때까지 웃어대는 엄말 보니 귀엽기도 하고 어쩐지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엄마의 기억 속엔 언제나 좋은 것만 가득하기를 바란다. 이따금씩 잊고 싶은 나쁜 것들은 싹 잊어버리는 건망증. 어쩌면 이 건망증은 엄말 가장 엄마답게 살게 하는 힘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