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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Oct 06. 2024

당신의 마음과 나의 마음은

무나씨 개인전 <찰랑>

연결되어 있다.


<찰랑>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두 명의 인물이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나이도 성별도 짐작하기 어렵다. 알 수 없는 두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물결과 함께 출렁이고 있다. 이 출렁거림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무엇이 이런 움직임을 만들어 낸 것일까?


물결은 두 사람이 움직임으로 생긴 것일까? 만일 이곳이 작은 웅덩이에 불가하다면 두 사람의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바다는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이 출렁거림은 바닷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의 움직임, 대지의 흔들림, 바람의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다. 바다는 직접 만나지 못했던 사건들,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시간과 기억을 파동으로 전달한다. 인물들은 단순히 물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다. 물과 함께하는, 함께 했던, 그리고 함께할 삼라만상과 찰나의 순간 만나며 흔들린다. 


파도가 그렇게 만들어지듯 내 마음속에 흔들리는 감정들도 그리고 나란 사람도 어느 날 한 순간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흔들림이 내 앞에 있는 너란 한 사람이 원인이지도 않다. 원인의 원인들, 이유의 이유들, 인연의 인연들이 겹치고 겹쳐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것일 테다.


저들은 어찌 저런 깊은 파도 속에서 평온한 얼굴을 하며 바다의 깊은 심연과 함께 찰랑일 수 있을까? 파도에 자신을 맡겼을 때 가능한 일이다. 바다의 위력에 압도 당하지도 않으며 바다를 제압할 수 있다는 허풍도 떨지도 말고 그저 몸에 힘을 빼고 바다에 나를 맡겨야 한다. 


물결에 나를 맡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잊는다는 것이다. 아상(我相)에 대한 집착을 놓는다는 것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이것이 아니면 죽는다고 생각했던 것, 어쩌면 내가 나에게 이름표 붙였던 것, 혹은 누군가 내게 이름표 붙였던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런 이름표를 내려놓는 순간 동시적으로 나를 잊게 된다. 나는 물결이 된다. 그리고 나는 너가 된다.  


<인인인연>, <나는나와나의나를>



나를 잊음으로써 내가 된다.


나를 잊은 경험이 있다. 6-7년 전쯤 음악심상치료를 체험한 적이 있었다.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의 이론인 '적극적 상상'을 유도하는 심상치료였다. 적극적 상상은 마음을 덜어내는 명상과는 달리 집중적으로 심상을 떠올리는 기법이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자유롭게 상상했다. 상상이 과정 중에 나는 과거의 인연과 이별했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내 곁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미움이나 원망의 감정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감사함과 이별의 애석함 뿐이었다. 지난 삶과 이별한 후 나는 아무것도 없는 흰색 방에 머물렀다. 아무도 없지만 무섭지도 외롭지도 답답하지도 않았다. 마음이 고요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다음 문을 열고 이동했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내 눈에는 이른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고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풀들이 반짝이고 공중으로 벌레들이 윙윙 날아다녔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누구일까? 그 순간 알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자연 그 자체였다. 나는 내가 본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고 느꼈다. 자연의 흔들림이 모두 나의 일부였다.


당시에는 이 경험을 해석할 수 없었다. '희주'의 과거와 이별하고 '자연'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 정도로만 이해했다. 최근 불교철학을 공부하며 그날의 느낌이 다시 생각났다. 이때 '자연'은 너무나 황홀한 경험을 했다. 너와 나의 분별이 사라지면서 내 육신이 작은 인간의 몸에서 세상으로 확장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삼라만상과 연결된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너가되고 너가 내가 되는 경험이었다. 


이것은 사랑의 감정과도 유사하다. 사랑할 때 우리는 나 자신이 너에게로 확장된 것 같다. 너가 마치 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너의 기쁨에 함께 동요되고 너의 슬픔에 함께 술렁인다. 사랑할 때는 우리는 강한 연결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때의 연결감은 이전에 경험해 본 이성애나 모성애를 통해 느끼는 감정과는 달랐다. 그날의 연결감은 가볍고 따뜻하고 평온했다. 자극적인 쾌감과 일시적인 안도감을 주는 기쁨이 아니었다. 지극한 평온함도 사랑이라면 이 사랑은 특정한 누구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은 너에게로, 그리고 너가 사랑하는 다른 너에게로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무한한 확장, 큰 사랑의 역량은 내려놓음으로 가능하다. 그 내려놓음은 죽음이다. 자아의 죽음이다. 나에 대한 집착이 줄어드는 만큼사랑이 열린다. 사랑의 크기만큼 나는 확장되고 자유롭다.


요즘 수영을 배우고 있다. 수영을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몸에 힘을 빼는 것이다. 땅 위를 살아가면서 필요했던 힘들을 우선 빼야 한다. 몸을 가볍게 하고 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물과 한 호흡이 되었을 때 물을 할퀴며 나아갈 수 있다. 몸에 힘을 빼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육지를 살아가면서 필요했던 무게, 수많은 세계와 부딪히며 나를 보호하기 껍질, 만일에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켜둔 비상장치까지 물속에서는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삶이 죽는 것이다.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려놓음이라는 것은 참고 억압시키는 것도 아니고 잘라내는 것도 아니다. 나를 숨기는 것도 아니고 나를 내다 버리는 것도 아니다. 물속에 있을 때 내려놓음의 상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나인채로 있다. 그저 나인채로 있다. 어떤 이름표도 어떤 의무감도 어떤 기억에 점령되지 않은 그 상태로 있다. 그 상태는 오로지 지금 현재에 있을 때 가능하다. 지금 현재에 존재할 때 지금 현재 내 몸에 닿는 차가운 물결을 느낄 때 그 차가움은 편안함이 된다.



흔들림 속에서 균형을 찾으며 나아간다.


<균형 III>


명상은 '지금-여기'에 있도록 도와준다. '지금-여기'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과거의 짙은 심연이 끌어당기더라도 미래의 혼란함이 느닷없이 불어 오더라도 오직 현재에 존재할 수 있는 균형감을 갖게 한다. '지금-여기'에 머물 수 있다면, 그 순간이 지속될 수 있다면, 그 시간만큼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찰랑일 수 있다. 


미술관에서 '지금-여기'를 느끼곤 한다. 미술관에서 나의 고통을 흘려보기도 하고 고집을 내려놓기도 한다. 또한 작품과의 공명을 통해 새로운 파장을 경험한다. 좋은 소설을 읽을 때도 그렇다. 좋은 글을 읽을 읽으며 내가 감정적으로 변형될 몸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는 체육관에서, 누군가는 책방에서, 누군가는 작업실에서 그리고 누군가는 산사에서 지금-여기를 느낀다. 


어느 곳이든, 어떤 방법이든 고집할 것이 없다. 안되면 다르게 시도해 보면 된다. 고민되면 물으며 길을 찾아 가면 된다. 정해진 답도 없고 고정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느끼고 싶고 연결되고 싶다. 내 삶과 그리고 세상과 연결되고 싶다. 내 삶은 그 방향으로 길을 내어가고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 무엇이 될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가고 있다. 언제나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나를 잊고 내가 되는 삶으로 가고 있다.






Exhibition Details

무나씨 개인전 <찰랑> 

2024. 08. 01 ~ 2024. 09. 22 (전시종료)

에브리데이몬데이 갤러리 (서울 송파구)

www.everydaymooon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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