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절임배추 작업 딱 하루 전날, 엄마가 크게 아팠다. 밤새 열이 펄펄 혼자 끙끙대며 밤을 지새우던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는데, 원인도 몰라서 피검사에 씨티까지 찍었다.
열이 펄펄 끓고 링거바늘을 몸에 몇 번이나 찔렀다 뺐다 하는 와중에도 엄마는 '내일부터 일해야 하는데, 오늘까지만 아파야 하는데'라고 했다. 아픈 것도 마음편히 하지를 못 하다니, 그럼 우리 엄마는 대체 언제나 되어야 맘 편히 아플수나 있는 걸까.
크게 아픈 뒤로 엄마는 항생제를 먹어가며 새벽 일찍 일어나 인부들을 태워오고, 철벅철벅 물속에서 절임작업을 하고, 또 인부들을 데려다주고, 밤까지 잔업을 한다. 저녁도 안 드신다.
엄마, 약 먹으려면 저녁 먹어야지라고 해도 안 드신다. 마음이 급해서 밥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진짜 가지가지 짠하다.
그런데 오늘 저녁, 엄마와 얘기를 나누다 깨닫게 되었다. 엄마가 아픈 이유를, 엄마가 이 죽일놈의 절임배추를 제발 그만두고 싶은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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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는 내리 비가 온단다. 절임배추 피크인데 월화수목 잡혀있는 비 예보는 바뀔 생각을 안 한다.
비가 오면 배추를 못 한다. 아니, 할 수는 있어도 일의 고난도가 10배 이상 높아진다. 지금도 모두 지쳤다. 벌써 지쳤다. 올해는 유난히 배추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래저래 성가시다.
그런데 가장 성가신 것은 아빠다.
가족들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다.
비가 온다니까 우선 톤백작업부터 와다다 해가지고 들여놓자. 그러는 동안 우리는 배추를 씻고 포장하는 작업을 할게.
아빠는 안 된단다. 무조건 차부터 왔다갔다 해야 한단다. 그리고 배추 쟁이는 건 주말부터 해도 된단다.
아, 그럼 배추 딸 시간이 없는데. 너무 촉박한데.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 지쳤는데. 엄마의 속이 타들어간다.
절임배추 내년부터는 정말 하지 말자. 너무 조마조마해서 못 하겠어. 박스는 안 터지고 제대로 가는지, 배추는 멀쩡하게 잘 도착하는지, 배추가 부족하지는 않은지, 배추를 밭에서 멀쩡하게 작업해올 수 있는지 여러모로 너무 신경을 많이 써야 해서 못 살겠단다.
절임배추를 하지 말자고 할 때마다 아빠는 눈에 불을 키며 으르렁거린다. 아니, 식구들 입에서 '안 된다, 못 한다'라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으르렁거린다.
가운데 새우처럼 멍하니 있는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빠 말도 맞고, 엄마 말도 맞다. 그래도 엄마가 더 똑똑하니까 엄마 말을 듣는게 나을 것 같다. 경험상 아빠말을 따를 때보다 엄마말을 따를 때 덜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저녁 엄마를 보니 내 속이 끓는다. 안 되겠다. 엄마가 맞고 아빠가 맞고를 떠나서 그냥 엄마가 아프면 안 된다. 엄마가 아픈 이유를 찾았다. 엄마를 지켜야겠다.
아빠에게 못난 딸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엄마를 지키려면 우선 아빠말보다 엄마말을 들어야 한다. 반민주주의적인 우리 집에서 그게 참 어려운 일이지만, 일단 내일 작은 전쟁을 치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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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지켜야 가족의 평화도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