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파킨슨 씨 병
아버지는 파킨슨 씨 병에 걸렸다. 작년 가을에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는 혼자다. 어머니는 2007년 여름에 돌아가셨다. 환갑도 못 되었다. 그렇게 혼자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파킨슨 씨 병에 걸리기 전까지 아버지는 괜찮았다. 혼자서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병에 걸린 후로 아버지는 많이 약해졌다. 팔순인 아버지는 이제 더 살 재미도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파킨슨 씨 병은 거동을 불편하게 만든다. 뇌 속 도파민의 생성을 막아 뇌가 몸을 조정하기 어렵게 한다.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대학병원에서 오만가지 검사를 하고 나서 치료법이라고 내미는 건 약뿐이다. 그 약도 별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진행을 좀 늦출 뿐인 듯하다. 참 고마운 것은 노인병이라고 국가가 치료비를 거진 다 지원해줘 병원비도 약값도 정말 껌값이라 거의 부담이 안 된다. 국가가 이렇게 중요한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석 달에 한 번 가서 대학 교수의 5분 진료를 받고 약을 타 온다. 그 약을 열심히 먹는다. 그래도 큰 차도는 없다. 의사도 별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아직 파킨슨 씨 병을 지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약 받아먹고 약 떨어지면 다시 병원 가서 약 받아오는 수준이다, 기름 떨어지면 주유소 가는 차와 비슷한 알고리즘이다. 서글프다.
불행 중 다행은 치매와 비슷할 수도 있지만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정신이 깨끗하다. 알츠하이머와 달라서 뇌를 갉아먹진 않는다. 신체적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정신은 그다지 변화가 없다. 나무늘보라고 생각하면 쉽다.
아버지 또래 친구들은 아직 다들 건강하다. 몇 분은 휠체어 신세라고 듣기는 했지만 정정한 분이 더 많다. 그래서 상대적 박탈감이나 억울함도 작지 않다. 그런 푸념을 들어주는 것도 효도라고 생각해서 답답한 마음을 함께 하고 듣고 있다.
객지에 나가 있는 장남을 대신해 막내아들인 내가 하는 효도라고는 몇 달에 한번 병원을 모시고 가는 것과 때때로 끼니를 챙기는 것뿐이다. 식사도 정성스럽게 내가 차려드리는 그런 것은 아니다. 급박한 시티 라이프에 그런 건 바쁨을 핑계 대야 할 사치다. 그냥 함께 나가 한 끼를 사 먹고 들어오는 것이 전부다. 그마저도 직장인이라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못 한다. 직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본가인 아버지 집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매일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 수 있다. 특별히 어디 가지 않는 이상 퇴근길에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도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아버지 살림을 거진 맡아 돌보고 있는 누나가 특별히 부탁을 했다. 가끔 제대로 된 밥이나 같이 나가서 먹고 들어오라고. 그전까진 거의 끼니를 챙기지 않아도 될 만큼 팔순의 아버지도 혼밥을 만들어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파킨슨은 그것을 방해했다. 밥을 하고 찌개를 데우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한다. 화장실 가는 것도 혼자는 무서울 정도라고 하니 그 고충을 알 만하다. 노인들 불의의 사고는 거의가 낙상이라고 하니 아버지도 그것을 겁낼 수밖에 없다. 노인 사망 사고의 대부분은 낙상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온 국민이 다 아는 전두환과 송해의 사망이다. 두 노인 지병을 앓았지만 결국 직접적 사인은 낙상이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해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면 영영 일어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장실과 목욕은 노인에게 치명적이다. 아버지도 그것을 힘들어하는 신세가 되었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갈 일이 생기고부터는 아버지 집 근처부터 뭔가 먹을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근처에 만만히 갈 밥집이 눈에 차지 않았다. 혼자서도 자주 찾는 순두부집을 빼면 그래도 나쁘지 않게 한 끼 든든히 먹을 식당도 없었다. 고깃집, 횟집 이런 것들이 대부분인데 고기를 매일 먹기도 그렇고, 회는 좋아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멀더라도 먹을 만한 것들을 찾아서 이곳저곳 가보았다. 그런대로 유명한 칼국수, 중국집, 국밥, 김치찌개 등 한 그릇 음식을 몇 번 찾아서 먹었다. 그렇게 몇 번 가니 아버지는 말은 별로 안 해도 다 만족해했다. 맛이 괜찮다, 먹을 만하다, 든든하다는 말로 집에서 만드는 혼밥보다는 확실히 좋아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기를 몇 차례 어느 날은 아버지가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자주 밥을 사주니 고마운데, 이제는 나도 좀 내자.”
그거 한 끼 얼마나 한다고 괜찮다고 아들 먹고살 만큼은 번다고 해도 굳이 그러겠다고 했다. 계속 그래서 말리지 않았다. 그러니 요즘은 밥 먹기가 더 편하다고 하신다. 죽는 날까지 아들에게 얹혀 밥이나 얻어먹는 신세가 되고 싶진 않다고.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그게 더 맘이 편하다는데. 아직 아버지 안 죽었다는 소리로 들려 반갑기도 했다. 브라보 아빠의 청춘!
가문이 대식가인 편이라 나도 잘 먹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먹는 양이 적지 않다. 남자 어른 한 그릇만큼은 거뜬히 비운다. 아버지와 마주 않아 밥을 먹으면 부자지간에 그다지 살갑게 나눌 말이 많지는 않아도 근황 토크 정도는 자연스럽게 되고, 정치 이야기, 바이든 이야기, 남북관계 이야기로 시간도 잘 간다. 진정한 효도 코스프레다.
문득 예전 양영순 작가의 누들누드가 떠올랐다. 부자지간에 만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만 먹고 헤어지는데 사실은 이미 저녁을 먹은 다음 만나서 또 먹는 거라 둘 다 소화제를 먹는다는 부자의 말 없는 사랑을 다룬 이야기다.
오 헨리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썼다. 추수 감사절의 두 신사라고, 해마다 추수 감사절에 같은 사람에게 밥을 얻어먹는 부랑자가 때마침 배가 터질 상태에서 그 사람을 만나 실신할 때까지 밥을 먹는데, 알고 보니 밥을 사주는 노인은 그 한 끼를 위해 돈을 모으느라 굶어 쓰러질 지경이었다는. 그보다는 참 다행인 게 나는 타고난 대식가라 저녁을 한 그릇 먹은 후에 또 만나 먹어도 소화제 먹을 일은 없다. 그보다는 말도 더 하고. 그보다는 돈도 더 있고.
아이에게 조부모라고는 할아버지 혼자다. 그렇게 친하고 정겹고 소중한 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손 관계인 사람이 하나뿐인데 아버지가 없으면 그것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한 세대의 완전한 소멸이다. 파킨슨 씨 병이라도 안고 오래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굽은 나무가 오래 선산을 지켜주길 바란다. 그래서 파킨슨 씨 병을 열심히 찾아보니 문인수 시인이 파킨슨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16년을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앞으로 16년 더 살면 천수를 누리는 셈으로 칠 수 있다. 있었던 일이니 어설픈 희망은 아니길 바란다.
주말이라 저녁에 밥을 먹으러 나갈까 싶다. 거의 늘 집에 있는 아버지니 전화 한 번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오늘은 어디 갈까 전화기 너머 아버지의 무심한 듯 설렌 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