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지영 Mar 03. 2019

헬프 (The Help, 2011)

철지영의 철지난영화리뷰 #2. 헬프

헬프 : 편견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착각


이 영화의 배경은 1963년 미국 미시시피의 잭슨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50여년 전 이 작은 마을 안에선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엄청난 차별과 억압이 만연하였다. 유색인들은 백인들과 같은 화장실과 식기를 사용할 수 없었고, 같은 병원에서 치료 받을 수도 없었으며, 같은 책으로 공부할 수도 없었다. 유색인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으로 법적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 시절 유색인들은 어쩌면 사람이 아닌 그저 물건 정도로만 취급 당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큰 용기를 냈고 그 커다란 용기에 감명 받은 작은 용기들이 더해지면서 그들은 희망의 싹을 틔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작은 용기와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잔잔히 전달한다.

문제는 이 영화의 배경이 지금으로부터 반 백년도 되지 않은 바로 어제의 일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는 누군가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차별이 타인에게 전해들은 이야기가 아닌 스스로의 경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마음을 너무 불편하도록, 한 편으로는 무섭도록 만들었다.

You is Kind.
You is Smart.
You is Important.



극 중에서 백인 가정의 가정부로 일하는 에이블린이 그녀가 돌보는 메이모블리라는 아이에게 종종 해주었던 말이다. 아이를 아끼는 마음에 건넨 응원의 말이자 장차 어른이 되어 여느 어른과 같은 괴물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건넨 당부의 말이자 한 편으로는 에이블린 그녀 자신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스스로 되뇌이는 말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 영화를 관람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3줄의 대사가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명대사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물론 나도 이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내 뇌리에 훨씬 강렬한 여운을 남긴 3가지 대사가 있었다.

#1. 힐리는 친구들과 집에서 파티를 즐기던 중 자신이 발의한 법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유색인 화장실 이용과 관련해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법안에 대한 설명을 들은 스키터가 힐리를 비꼬는 듯한 언사를 보이자 신이 나서 떠들던 힐리가 순간 정색을 하며 이야기한다. "유색인과 관련한 문제를 농담으로 넘겨서는 안돼."

#2.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지고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강요되는 여성상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존감마저 바닥을 치던 스키터에게 가정부 콘스탄틴은 또 한 명의 어머니이자 인생의 멘토 같은 존재였다. 그런 콘스탄틴이 어머니로부터 비정하게 버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스키터는 어머니를 향해 원망을 쏟아낸다. 이에 스키터의 어머니가 그녀의 딸을 향해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억울함을 토로하며 말한다. "네가 날 원망할 줄 알았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3. 스키터가 쓴 책이 흑인가정부의 삶을 다룬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된 스튜어트는 스키터에게 불 같이 화를 낸다. 바로 눈 앞에 존재하는 인종차별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스키터에게 스튜어트는 이 같이 반문한다. "모든게 다 괜찮은데, 왜 구태여 문제를 만들어?"

위의 세 인물의 대사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자신의 언행이 잘못 되었다는 자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즉,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뉘우칠 기색이 없다.'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 애초에 그것이 잘못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한게 없으니 반성할 필요도, 변화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끝까지 변화하지 못한다. 힐리는 더욱 악랄한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었고, 스튜어트는 스키터를 떠나버렸다. 스키터의 어머니가 영화 후반부 조금은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는듯 하지만 이는 딸의 모든 것을 보듬어 주려는 어머니로서의 모습일 뿐, 인종차별 문제를 바라보는 개인의 가치관이 변화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더욱 무섭게 느껴졌고, 또한 그렇기에 그 속에 움튼 용기가 더욱 경이롭게 다가왔다.

이렇듯 영화는 그 시절 약자들이 겪어야 했던 비참한 현실을 그들의 경험 그대로 관객들에게 차갑게 전달한다. 누가봐도 악역에 해당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등장해 "나 악역이오."라고 광고하듯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을 자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유색인종을 차별하면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가치관 따위가 어느정도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를 면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힐리는 좀 악랄하긴 했다... 절레절레...)


덕분에 관객들조차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잘못된 행동이고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를 명확히 구분하기가 상당히 모호해진다. "누가 시켜서 그런거니까...", "누구 눈치가 보여서 그런거니까...", "직접 나서서 한 건 아니니까..." 이런 생각들이 모여 판단의 근거를 흐릿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당시 유색인종들이 얼마나 외롭고 참담한 현실에 내던져져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해준다.

이처럼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나 그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들은 사뭇 무겁고 엄숙하다. 하지만 반대로 영화 그 자체를 놓고 봤을때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도 있었다. 바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여자'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철저히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스토리를 이끌어 나간다. 눈에 띄는 남자캐릭터라고는 스키터의 남자친구인 스튜어트와 셀리아의 남폄 조니 정도가 전부다.


영화는 차별 받는 흑인, 그 중에서도 가정부들의 모습을 통해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에게 차별을 당하는 동시에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에게 억압 받아야 했던 바닥 중에서도 바닥에 깔린 이들의 삶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생각 외로 영화의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암울하지는 않다. 몇몇 장면에 힘을 싣기는 하였으나 전박적으로 이 영화는 '재미'와 '감동'을 동반한다. 그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요인이 바로 '여자 중심의 전개'였다고 생각한다.


"어떠어떠한 것이 모름지기 '여자다움'이다."라는 성 역할론적인 관념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목소리 톤이나 다양한 표정 등을 바탕으로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다. 감독은 이러한 '여자'의 장점을 통해 다소 무거울 수도 있었던 주제를 보다 밝은 분위기로 풀어냈다.

민감하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감독은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플롯을 통해 그것이 크게 불편하거나 지루하지 않게끔 아주 영리하게 영화를 풀어나간다. '여성' 중심의 스토리라인을 꾸려나가는 모든 영화들의 귀감이 될 만한 작품이지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밝은 분위기에 비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사뭇 묵직하다.


이제 겨우 50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니 어쩌면 차별은 아직 온전히 뿌리 뽑히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여전히 그 시절 그 모습대로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대상이 달라지고 형태가 달라졌을 지언정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더 이상 차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망상에 젖어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는 그 옛날 그들이 진정으로 부르짖던 그 이상향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타협하며 착각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지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영화 '헬프'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라랜드 (LALA LAND, 201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