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지영의 철지난영화리뷰 #3. 인투더와일드
인투더와일드 : Meaning of Supertramp's Death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가 추천해준 영화였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지도 높고 동시에 평이 좋은 영화라고 소개 받았지만 장장 2시간 20분이라는 엄청난 러닝타임이 주는 압박감에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좋은 영화를 소개해줬으니 어서 관람하고 후기를 공유해달라'는 추천인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무려 '크리스틴 스튜어트'라는 세상 사랑하는 배우의 출연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2시간 20분을 투자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영화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무려 12년 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이질감은 없었다. 오히려 영화가 자아내는 독특한 분위기 덕에 아마 시간이 더 흐른다고 한들 촌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연출 자체도 상당히 촘촘하고 짜임새가 좋은 편이라 14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영화가 끝나고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았다.
결말이 왜 이래?..
'인투더와일드'는 '맥캔들리스'라는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실화를 배경으로 하니 당연히 결말은 정해져 있다. 맥캔들리스는 죽는다. 그의 죽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감독의 의도가 투영될 수 없는 부분이다. 내가 의아했던 부분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었다.
맥캔들리스는 죽음 직전에 그가 평소 즐겨읽던 '닥터지바고' 속 'unshared happiness is not happiness(공유되지 않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라는 문구 위에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행복은 공유할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라는 글귀를 남겼다. 반면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I HAVE HAD A HAPPY LIFE(난 행복한 삶을 살았다)'라는 꽤나 만족에 찬 유언 아닌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맥캔들리스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남긴 흔적들을 통해 그의 최후를 어림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감독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글귀보다는 'HAPPINESS ONLY REAL WHEN SAHRED'라는 문구에 철저히 초점을 맞췄다. 행복을 찾아 호기롭게 알래스카로 향했던 청년은 알래스카 한복판에서 영양실조와 중독증세로 죽어가는 와중에서야 비로소 '행복은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이상향 끝에서 행복을 발견한 모습이 아닌 극도의 불안과 후회, 고통과 절규만이 가득한 끔찍한 최후가 되었다. 이것이 감독이 그려낸 이 영화의 결말이었다.
도대체 왜였을까? 죽는다는 사실 자체를 왜곡할 수는 없어도 좋은게 좋은거라고 '꿈 많던 청년이 안타깝게 죽었다.', '자신이 꿈꾸던 곳에서 안식을 찾았다.' 정도로 충분히 완곡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한참을 고민하면서 영화를 몇 번이나 돌려보던 끝에 어렴풋이나마 감독의 의도를 알아챌 만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If we admit that human life can be ruled by reason, then all possibility of life is destroyed.(이성이 인간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삶의 모든 가능성은 파괴된다.)'. 극 중 맥캔들리스가 콜로라도 강에서 무면허 카약 라이딩을 즐기며 읊조리는 인용구다.(톨스토이의 저서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문구다.) 맥캔들리스는 그 삶이 끝날지언정 그의 삶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삶의 자세를 대변하는 위 문구를 곱씹다보니 한 가지 이론이 떠올랐다.
'코끼리 말뚝 이론'으로 유명한 'The Elephant Theory'는 서커스단에서 어린 코끼리를 말뚝에 묶어두면 성체가 되어 말뚝을 뽑아낼 힘이 생겨도 이를 뽑아내지 못하고 말뚝 주위를 멤도는 코끼리의 모습에서 착안한 이론이다. 즉 사람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정의하고 이에 거듭된 좌절을 반복하다 보면 훗날 이를 넘어설 능력을 갖추게 되더라도 그 한계를 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맥캔들리스가 '삶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코끼리 말뚝 이론'을 떠올린 이유는 간단하다. 맥캔들리스는 말뚝을 뽑아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말뚝을 뽑아내고 야생을 누비는 코끼리가 그렇지 못한 코끼리에 비해 더욱 행복한 코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말뚝을 뽑아내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막상 말뚝을 뽑는다 하더라도 '제 2의 맥캔들리스'가 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감독에 의도가 녹아있다.
사람들은 야생의 코끼리가 서커스의 코끼리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은 야생의 코끼리는 먹을 풀이 없어 굶어 죽을 수도, 맹수나 밀렵꾼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자유의지로부터 오는 행복은 쟁취할 수 있을지언정 기아와 천적의 위협으로부터 코끼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그 자신의 몸뚱이 뿐이다. 감독은 맥캔들리스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이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순수한 열정으로 시작한 일이 얼마나 어이없고 비참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물론 감독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바가 '위험하니까 말뚝은 뽑지마!' 따위 일리 없다. 다만 많은 이들이 알고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야생을 누비는 코끼리의 모습이 얼핏 멋있고 낭만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그 이면에는 하루하루 생존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나가는 노력이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말뚝을 뽑아버리고 싶다면 먼저 철저히 준비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엔 두 가지 부류의 멘토가 있다. "잘 될거야. 할 수 있어. 힘을 내렴."이라고 말하며 힘을 복돋아주는 유형과 "엿 될 수도 있어. 그래도 해볼래?"라고 묻는 유형.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독은 철저히 후자에 해당하는 유형이었던 것 같다.
결과야 어찌되었건 그 의도만큼은 높이 살 만했던 패기 넘치는 젊은 청년의 도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영화를 몇 번이나 되감아보고 그의 관한 많은 글을 찾아봤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아직도 나는 그가 위대한 모험가인지 오만한 멍청이인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 지도 한 장 없이 설악산에 올랐다가 등산객 휴게소로부터 500m 떨어진 곳에서 조난 당한 채 발견된다면 사람들은 그를 멍청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나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비단 그것이 산 속에만 국한되는 이야기인가 하면 또 그렇지 않다. 삶을 살아가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한 발 떨어져보면 너무나 쉽고 명쾌하지만 그 중심에서 모진 풍파를 직면하는 와중이라면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그 사실을 알기에 많은 사람들은 어리석은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캔들리스에게 열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독은 맥캔들리스의 삶을 단순 미화해 '그는 비범하고 위대했으며 언제나 옳았습니다.' 따위의 상투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대신 그의 죽음을 아주 비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관객들에게 한층 더 깊은 고찰과 울림을 전하고자 했다. 단순히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여행자들 뿐만이 아니라 한 번 쯤은 나를 구속하는 말뚝을 뽑아보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 시대 모든 '인생의 여행자'들에게 영감이 될 만한 영화였다.
오프라 윈프리는 '행운이란 준비와 기회의 만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맥캔들리스의 죽음을 통해 '준비'의 중요성에 대해 배움을 얻었다. 그러니 지금 당신에게 꿈이 있다면 두려워 말고 준비해 나가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언젠가 모든 준비를 끝마치는 그 날, 당당히 말뚝을 뽑아버리고 기회를 향해 걸어가기를 바란다. "I Now Walk, Into The Wild"를 외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