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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Aug 31. 2021

산후우울증

"나도 모르게눈물이 나는걸 어떡 해요"


아이를 낳고 약 한 달간은 산후우울증을 겪었다. 불안하고 겁나고 하염없이 서운하고 눈물이 났다. 크게는 육아에 대한 두려움과 남편에 대한 서운함이 산후우울증의 두 축을 이뤘다.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 다른 산모들은 TV 드라마도 몰아서 보고 잘 지낸 듯 보였지만, 나는 조리원 방 안에서 TV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주로 당시엔 모유수유 걱정과 자신감의 부족에서 비롯된 육아 불안감이 내 감정을 잡아먹었다. 20명에 가까운 산모들이 조리원에 머물렀는데, 수유실에서 만난 엄마들은 다양한 인간군상이었다. 특히 둘째 및 셋째 엄마들로 구성됐던 한 무리 군의 산모들은 '여유로움'을 자랑했다. 첫아이를 낳은 산모들에게 "처음이라 그런가 본데"라는 첨언과 함께 조언 비슷한걸 자주 해줬는데 그들 앞에선 "아 그렇군요. 고마워요"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론 그 모습이 '잘난 체'와 다름없어 아니꼽게 보였다.  


자연스럽게 첫째인 엄마 위주로 친분을 쌓게 됐다. 초보 엄마들의 경우 허둥대는 것부터 눈물이 많은 것까지 나와 많은 면이 비슷했다. 하루는 어떤 아이가 분수토를 심하게 했는데 아이의 엄마는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조리원 선생님들께서 "분수토는 아이들이 간혹 한다. 너무 걱정 말라"라고 다독였지만, 그 엄마는 이미 이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 같다며 울고 또 울었다. 감정이입이란 이런 걸까. 그 엄마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조리원에선 육아의 불안함이 우울증의 원인이었다면, 집에 온 뒤부턴 남편의 '말'과 '행동'이 우울함의 주원인이었다. 임신 기간 내내 임신부인 나를 위해줬다면, 오롯이 1순위는 아이의 몫이었다. 엄마로서 그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심 서운했다. 마치 남편이 나를 아이 돌보는 보모 취급한단 생각이 들었다. 또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다. 친정엄마가 산후조리를 도와주던 시절, 엄마가 남편 저녁 반찬으로 생선을 구웠다. 남편은 생선 냄새 때문에 아이가 힘들어할까 걱정하며 내게 와 "(장모님께) 환풍기 좀 켜고 하시라 그래"라고 말했다. 그 말이 너무나 서운했다. 나에게 한 모진 말보다 백만 배는 더 서운하고 속상했달까. 새벽 수유를 하면서도 그 말이 가슴에 꽂혀 내내 울었다. 가끔 남편이 "둘째 어때?"라고 떠볼 때마다 나는 그때의 일을 거론한다. 그러곤 맞받아친다. "내가 미쳤니?" 산후우울증은 호르몬 영향이 꽤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과잉 감정 그 자체였다. 별거 아닌 것에 눈물이 났고 불안했고, 서러웠다. 그리고 출산 한 달여 쯤 지나 어느 정도 감정 조절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더 이상 별거 아닌 일에 서운하거나 눈물이 나거나 하지 않았다.



감정의 아픔은 훗날 돌연 엉뚱한 시점에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회사 복직 후 한 달여 만에 인사이동 대상이 돼 새로운 부서에서 일하게 된 지 석 달째 접어든 시점이었다. 일을 하던 중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라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곧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나를 잡아먹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부모님도, 남편도 아닌 아들 쮸니가 유일했다. "내가 없으면 우리 쮸니는 어떡하지. 엄마 없이 어떻게 클까. 오늘 아침에 출근이 늦어져 서둘러 나오느라 쮸니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쮸니를 더 이상 못 보면 어떡하지." 5분 남짓, 이 생각만 들었다. 


호흡은 가팔라졌고, 몸이 저리고 굳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회사 사람들의 신고로 도착한 119 대원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게 119 구급차에 실려 인근 2차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꾀병인가 싶을 정도로 30분 정도 지나자 정상으로 돌아왔다. 심장검사 피검사 폐검사 모든 검사 결과 산소포화도가 높을 뿐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내게 "이런 적이 처음이시냐"라고 물었다. "난생처음이다"라고 답했다. 의사는 내게 "아무래도 공황발작인 것 같다"라고 했다. "공황발작이 올 수 있는 최대치가 온 것 같아요."라는 설명과 함께. 


의아했다. 연예인이나 걸리는 병인 줄 알았던 '공황'이라는 병이 내게 올 줄이야. 뭐가 문제였을까. 추후 진료를 보며 담당 의사가 진단해 주기론, 갑작스러운 인사에 대한 스트레스 그리고 무엇보다 야근이 많아지며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는 육아에 대한 죄책감이 나를 괴롭혀 부교감신경의 교란까지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감기 같은 것이니 치료하면 된다고 타일러줬다. 그리고 우리네 인간은 슈퍼 인간이 아니니 일이며 육아며 너무 큰 책임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다. 


공황발작이 왔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죽을 것 같던 순간에도 나는 쮸니만 생각했다. 그래서 꼭 이 병을 완치하기로, 몸도 정신도 건강해지기로 그때부터 마음먹었던 것 같다. 다행히 1년간 치료를 받으며 나는 한 번도 공황발작이 재발되지 않았다. 재발이 많은 병이기에 늘 재발 가능성을 염두하고 생활하라는 이야길 들었지만, 다행이었다. 1년 후 의사로부터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치료를 끝낸 지 5개월이 된 지금까지도 재발은 없었다.


건강한 엄마로 쮸니 곁에 오래 있고 싶었다. 공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3월부터 현재까지 5개월간 몸무게도 10kg를 뺐다. 미용 목적이 아닌 그저 건강해지고 싶은 마음 덕분이었다. 그 결과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섰을 때와 거의 비슷한 몸무게를 갖게 됐다. 건강한 음식을 먹었고, 하루에 적어도 30분은 운동하려 애썼다. 아이 곁에 하루라도 더 있고 싶은 모성애 덕분에 결혼 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다이어트도 수월히 성공할 수 있었다. '엄마는 강하다'는 상투적인 말이 결코 상투적이지 않다는 걸 몸소 경험했달까. 그날 이후로 건강한 엄마로 사는 것, 아이를 위해 엄마가 해줄 수 있는 나의 최선 중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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