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하고 카페로 향하는 길이었다. 일자로 쭉 뚫린 저 멀리 길 끝자락에 노오란 은행나무가 보였다. 노랑이 이토록 눈부신 색이었나. 쉬이 눈을 떼지 못한 채 걸었다. 코너를 돌기 전까지.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에서 우연히 누군가 뒤에 설 때가 있다. 멍하니 차례를 기다리다가 앞사람이 멘 검은색 백팩에 매달린 노란 리본을 발견하곤 반가워진다. 괜스레 앞사람 얼굴을 올려다보곤 고요히 따뜻해진다. 세월이 지나간 후에도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진실과 이를 자연스레 드러내는 사람을 마주했다는 점이 그렇다. 가방을 멘 이는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찾아보며 일상을 살아간다. 반면 나의 노란 리본은 늘 서랍 한쪽에 고이 놓여 있다. 어떤 마음은 드러날 때 설명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또 어떤 마음은 타인에게 나를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낯선 이에게 나에 대한 불필요한 정보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결벽증 같은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시간이 지나 언젠가 떼어내야 할 때 무너지는 마음이 두렵기 때문일까. 나의 노랑은 제자리다. 쉬이 꺼내지지 않는 침잠한 슬픔처럼.
올해는 두산아트센터에서 매 달 연극을 한 편씩 보고 있다. 인문학극장에서 소개하는 연극을 차례로 보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다. 덕분에 뜻밖에 마주한 좋은 것도 아쉬운 것도 있다. 그럼에도 1년 동안 본 것들을 찬찬히 돌아보니 하나의 영화제에서 발견한 기쁨과 꼭 닮아 있다. 쉽사리 들여다보지 않는 삶의 단면을 발견한 것만으로 소중하다. 새 연극 <시차>를 보러 가기 전, 참사가 소재라는 것만으로도 불쑥 겁이 났다. 세월호 10 주기가 지나면서 수많은 영화들이 개봉했지만 이를 직면할 자신이 없어 도망 다녔다. 상처가 채 낫기 전에 붙여놨던 대일밴드를 들춰보는 것처럼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기어코 막이 올랐고, 캄캄했던 객석이 밝아져 극장을 나설 땐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위로를 건네받은 느낌이었다. 따뜻해졌다.
연극 <시차>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참사를 어떻게 겪어내는지에 대해 그린다. 남아 있는 이들은 '뭐라도 하고 싶어서' 자신의 시간을 살아낸다. 과장하지 않은 진심이 서린 연기를 작은 극장에서 아주 가까이 볼 수 있다. 상처를 집요하게 후벼 파지 않고도 기어코 따뜻함을 건네는 이야기라 좋았다. 참사 끝에 살아남은 이들은 오늘의 볕에서 위로를 발견하며 살아간다. 어떤 위로는 우리가 나란히 살아간다는 진실만으로 명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