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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 Mar 12. 2019

추천하고 싶은 책 - 걸리버 여행기

대 항해 시대와 미지의 세계. 그리고 이기적인 인간


                                  

 나는 걸리버 여행기를 초등학교 때 처음 읽어보았다. 소인국과 거인국이 존재하는 이상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걸리버는 환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모험가였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이 책은 내가 읽어보았다고 생각한 그 책이 맞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무삭제 완역본을 우연히 읽으면서 표지에 적힌 “금서의 책”, “왜 4부는 삭제되었는가?”라는 문구를 보며 예전에 읽은 동화책 버전의 ‘걸리버 여행기’와 4부까지 있는 ‘걸리버 여행기’의 차이점을 찾아보려 노력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였는지, 예전에 읽었던 내용도 새롭게 읽혀 그 뜻을 새겨보게 되었는데, 왜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을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항해하는 걸리버는 번번이 이상한 곳으로 떠밀리게 되는데, 그 과정도 기상이변이나 해적의 공격으로 시작된다. 새로운 모험을 찾아가는 시도는 계획적이었으나 기획되지 않은 사건들로 인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사이의 시기에서 영국의 대외팽창과 일반 시민들의 욕구가 짧게 그려지는데, 특히 해적으로 등장하는 네덜란드인에 대한 걸리버의 반감이 당시의 유럽 패권을 두고 대립했던 두 나라 ( 영국과 네덜란드 )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여하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배를 타고 떠나는 걸리버는 총 4번의 난민 상황을 겪게 되는데, 1부에서 4부까지 걸리버가 경험한 신비한 나라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1부의 작은 사람들의 나라와 2부의 큰 사람들의 나라에서 이성적이고 현명하다고 생각되었던 걸리버의 양면성을 볼 수 있었다. 걸리버는 작은 나라인 릴리퍼트에 머물면서 이웃나라인 블레 휘스크와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블레 휘스크의 군함 50척을 끌고 오는 전공을 세워 릴리퍼트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릴리퍼트의 국왕은 언젠가 블레 휘스크의 다른 군함 역시 끌고 와 달라는 요청을 하는데, 이에 걸리버는 ‘자유롭고 용감한 국민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도울 수 없다’고 말하면서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이로 인해 작은 사람들의 나라를 떠나게 되는데, 걸리버의 이런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사고는 2부의 큰 사람들의 나라에서 급변한다. 브롭딩낵의 왕에게 호감을 더 얻기 위해 걸리버는 화약과 대포를 소개하며 자신이 왕을 위해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브롭딩낵의 왕은 그러한 파괴적인 기계는 사람을 괴롭히는 악마가 만든 것임에 분명하다고 말하며, 걸리버가 이야기한 유럽의 여러 나라와 사람들을 ‘세상의 표면에 기어 다니게 된 생물 가운데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에 걸리버는 왕을 ‘편협한 원칙과 근시안적 안목의 이상한 결과’, ‘정치를 과학으로 만들지 못한 무지의 소치’라며 비난한다. 작은 나라에서와 큰 나라에서 걸리버는 고결함과 천박함을 동시에 보여준 것이다. 아마 이는 주변의 상황에 따라 걸리버의 처신이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약이 없는( 작은 나라에서는 귀찮을 정도의 공격과 질투를 받았지만, 이는 걸리버의 의지만 있다면 파괴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 상황에서는 사람은 관대해진다. 자신의 결정으로 결과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에서는 ( 걸리버는 큰 사람의 나라에서는 왕의 호감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 이기적이 될 수 있다.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 때문에 걸리버는 두려워하고, 영악해져 갔다. 이러한 위기를 겪은 후에도 집으로 돌아온 걸리버는 경제적 욕망으로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3부 하늘을 나는 나라의 여행은 현실성과 너무 동떨어진 이상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 책이 18세기에 쓰여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당시 유럽의 계몽주의나 과학혁명에 대한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물론 강력한 자기력의 힘으로 하늘을 날 수 있고, 다양한 방법의 학문을 탐구하는 것에 모든 것을 쏟아 지식과 기술 발전에 앞장서는 라푸타의 지배층들이 대단해 보였지만, 그들의 한계는 너무 먼 곳만 바라보기에 당장 한 발 자국 발걸음을 옮길 때조차 시종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과연 행복할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행복’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정의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앞의 1부 내용에서 계란을 깨는 방법으로 사이가 나빠진 릴리퍼트와 블레 휘스크가 영국의 두 정당을 빗댄 것이라고 설명되어있다. ‘뭘 이런 것 가지고 사이가 나빠질까’라고 생각하기엔 우리 역사 속에서도 예송논쟁이 있었기에 웃고 넘길 수는 없을 듯하다. 3부의 라푸타는 지식이 계급이 되는 사회에서 기본적인 인간성과 공감 없는 학문의 발달이 얼마나 삭막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래서 풍자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4부를 읽어보니 여기까지는 예고편밖에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말들의 나라로 휩쓸려 간 걸리버의 3년간의 생활은 시대의 풍자를 넘어 ‘인간성’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작가가 인간을 싫어하나?’라는 생각은 2부 때 큰 사람들의 신체를 작은 걸리버의 눈으로 설명할 때부터 느꼈지만( 미시적 관점으로 사회를 설명하는 2부에서 걸리버는 큰 나라 사람들의 신체를 그로데스크 하게 서술한다. 이는 제도하에서 소외되는 개인의 결핍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 4부에서는 인간을 ‘경멸’의 대상으로 드러낸다. 순수와 정의, 사랑과 고결함으로 대변되는 지성적 존재인 ‘휴이넘-말’과 본능적인 이기심과 추악함으로 등장하는 ‘야후-인간’의 대비는 걸리버를 동족 혐오로 이끈다. 앞선 여행의 나라와 달리 억지로 쫓겨 난 걸리버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가족과의 생활을 견뎌야 하는 시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마구간에 매여있는 말들을 보며 지성과 고결함을 잃은 휴이넘에 슬퍼하며 야후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견디지 못한다. 여기서부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작가가 고국인 영국과 당시의 유럽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풍자소설’을 쓴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4부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부분은 아직까지 나의 능력 밖의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설프게나마 정리해 본 관점은 ‘우리는 야후와 휴이넘의 어느 사이에 있는 게 아닐까?’라는 것이다. 본능과 이성, 욕망과 절제, 불안과 평안 사이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불의와 정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이성적이지만 감정의 지배에 쉽게 휩쓸리고, 동정심이 많지만 이는 타인보다는 자신을 위해 베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근대의 시작을 열고 있는 문 앞에서 조나단 스위프트는 당시의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인간은 휴이넘을 향해 가도록 진보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계몽사상가들이 주장하는 )  언제든 야후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경고를 준 것이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좀 더 시간이 흐른 뒤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4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시간이 된다면, 에스윈 A 배보트의 [플랫랜드]도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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