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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 Jun 05. 2020

모성은 권능이 아니다

우리는 가해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쉽게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부모는 ‘부모’로 타고난다는 생각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처음부터 ‘부모’를 가진다. 그러나 부모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가 아니다. 그들도 누군가의 자녀였고, 선택을 통해서든 떠밀리는 사고였든 갑자기 ‘부모’가 된다. 처음부터 ‘부모’가 아니었기에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며 우리들은 자녀들을 사랑하고 가르치고 이해하려는 것에  능동적일 수 없고 언제나 상황에 비교당한다. 부모로서의 개인은 독립적이지 않다. 사회의 제도와 관념에 의해 규정되고 타인에 의해 인정받으며 자녀의 행동과 성취가 곧 부모의 위치를 결정한다. 특히,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는 더욱 친밀하다. 아니, 친밀하게끔 강제된다. 자녀의 가치관, 행동과 결정, 능력과 성취, 도덕적 역량은 어머니라는 토양 위에서 발생하고 성장한다고 사회는 ‘믿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죄는 곧 부모의 죄다. 사소한 예를 들어보자. 초. 중등생의 경우 학업 성취가 낮거나 장난이 심하다거나 교우관계가 나쁘면, 사람들은 쉽게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저래?’라는 생각을 한다거나, ‘엄마는 집에 계시니?’라는 질문을 한다.  좀 더 나아가면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아버지 뭐하시냐?’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취업 면접에서의 가정사 질문, 결혼 상견례의 부모 면접 등등 사회는 가족관계, 특히 부모를 통해 개인을 해석하며 이해한다. ‘자녀’의 행동에는 마땅히 부모의 의지나 인식이 반영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강도의 세기는 다르더라도 모든 세계에서 통용되는 청소년 범죄의 탐구 기반은 ‘부모’, 특히 ‘어머니’이다. 역사시대 이래로 가장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모성’이 아닐까. 모성은 완전하고, 숭고하다. 또한 애정에 기반을 둔 희생 위에서 찬미된다. 여성은 ‘모성’을 통해서야 비로소 위대해진다. 하지만, 모성이 뭐란 말인가. 개인은 개인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고통스러운 상황의 거짓된 희망이 아닐까. 그런데도 사회는 부모. 특히 어머니는 자녀를 완전히 이해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과 알아야 한다고 강제한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모성에 의해 쓰여진 책이다. ‘어머니’인 수는 ‘아들’인 딜런의 죄를 이해하기 위해 아들이 살인하게 된 이유와 자살하게 된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애정으로 키운 아들이 졸업을 앞두고 친구와 함께 고등학교에서 행한 총기난사 범죄에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부모로 겪게 되는 충격과 절망은 아들의 자살 앞에서도 슬픔을 표출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아직 부모가 아니기에 나는 ‘아들의 자살’과 ‘가해자인 아들’ 중 무엇이 더 엄마로서의 수에게 고통이었는지 읽어낼 수 없었다. “나는 우리 아이가 남을 더 해치기 전에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어머니는 평범한 워킹맘이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스럽게 이름 불렀던 아들은 에릭과 함께  친구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교실에 수류탄을 던지며 자신이 다녔던 학교를 파괴한다. 도서관에서 각자의 기관총으로 자살한 두 아이들은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필연적인 이유로 살인을 저질렀으리라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딜런이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가지고 불안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 믿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들은 스스로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  ‘why'가 아닌 ’how'에 초점을 두며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 해결책을 찾는 어찌 보면 단순한 답일 수 있다는 점은 깊은 공감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책은 부모만으로 찾도록 강요될 수 없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 전지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픽션이지만 이 책과 비슷한 주제를 가진 영화가 있다. [케빈에 대하여]와 [러덜리스]는 각각 가해자 아들을 둔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들도 딜런의 어머니인 수와 다르지 않은 평범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이다. 물론 성향 차이는 있다. 케빈의 어머니인 에바는 얼떨결에 부모가 되어 모성이  결핍되어 있고, 아버지인 매닝은 사회생활이 우선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의 인물과 부모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자식을 ‘알지 못한’것에 대해 스스로 고통받는다.  살해당한 자식을 가진 ‘피해자’인 부모들은 ‘가해자’인 부모에게 묻는다. “왜”냐고. 그러나 수도, 에바도, 매닝도 답을 할 수 없다. ‘부모’는 ‘자녀’와 동일인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들로 인한 ‘피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성은 권능이 아니다. 그 누구도 서로 다른 개인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보고 싶은 이미지를 덧칠하며 나와 타인을 비교하며 타협해 나간다. 천륜이라고 부르는, 가장 내밀하고 밀접한 관계인 부모 자식 간에도 결국은 아와 비아의, 개인과 개인의 마주함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가장 기본적이지만 무소불위의 가족관계, 특히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합리적 의심과 이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주제이지만 [데드 맨 워킹] 역시 좋은 영화이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이야기를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수녀의 이야기이다. 살인자에게 관심과 동정심을 보내는 수녀에게 피해자의 가족들은 배신감과 비탄함을 토로한다. 영화를 통해, 혹은 책을 통해 가해자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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