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캐비닛을 열어 수많은 이야기를 읽다
조그만 크기의 캐비닛 주인은 자신이 보여줄 수 있고 가장 자신 있는 것들을 가능한 한 많이 모아 소중히 펼쳐 담는다. 캐비닛은 작가 자신에서 시작해 뉴욕타임즈, 페이스북, 듀오링고, LG 등 세계 다양한 공간에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예술가와도 공존했다. 어느새 꽉 채워진 캐비닛을 나는 조심스럽게 한 칸 두 칸 열어보았다. 그 캐비닛에선 내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섬세한 디테일을 가진 맥시멀 '읽는 그림'들이 있었다.
인물은 단 한 명만 나오는 그림이 첫 번째 캐비닛에 다수 등장한다. <티레니아해 옆 서재>, <여름>, <주말> 등 나와는 다른 환경, 공간에 살고 있는 등장인물에 친근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등장인물에 나를 투영시킨다. 그들이 느끼고 있을 좋은 감정들만, 그리고 내가 느낄 부정적 감정의 해소만을 꿈꾸며 작품을 바라본다.
시원한 바다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집 앞 계단에 걸터앉아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커피, 그리고 담배를 곁에 둔 채 느지막이 바다를 바라본다. 울창한 나무 아래 듬성듬성 그늘지는 그 모습마저 자유로움으로 다가온다. 멈춰있는 그림에 살짝 부는 바람 따라 일렁이며 춤출 나뭇잎 그림자와 저 멀리 작게 들려올 파도 소리, 숲속 새소리와 곤충 울음소리까지 생생함을 입혀본다.
등장인물이 기쁜지, 슬픈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저 풍경을 실제로 바라보며 한편에 앉아있는 내가 등장인물을 대신해 본다. 내가 좋아하는 신미 살짝 돋는 아이스 라떼를 내가 자주 사용하는 빨대 있는 텀블러에 담아온다. 다이어리와 헤르만 헤세의 필사집이나 소설 한 권도 챙긴다. 적당한 자리에 등장인물처럼 털썩 앉아본다. 가져온 노트는 일단 옆에 두고 한적한 바다를 바라본다.
살짝 덥지만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 더위도 자취를 감춘다. 다이어리에 헤르만 헤세의 문장들을 필사한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는다. 그리고 다시 바다를 번갈아 마주하며 차가운 라떼 한 모금 마신다. 천국이 따로 없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거겠지. 시간이 지나고 자연스레 졸고 있는 나는 조금 눈을 붙이기도 한다. 슬슬 배고파지면 이 자리를 떠난다. 여유롭고 나의 과거와 미래가 전혀 관여하지 못하는 좋은 하루다. 만족스럽다.
그림의 제목은 너무나 그림을 잘 표현해 준다. 간결한 하나의 단어만큼 잘 표현해 주는 제목은 없다. 주말. 일주일 주중을 살아가게 만드는 주말이다. 나는 보통 주말에도 일정을 꽉꽉 채워 보내는 편이다. 주중에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기 위해,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 주말도 바쁘게 보내기를 선택했다. 어쩌면 자연스럽게 선택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늦잠 자고 하루 종일 집에서 밍기적대는 날이면 주말을 뿌듯하게 보내지 못했다는 마음에 아쉬움과 후회를 느낀다. 요즘엔 그런 날도 나에게 가끔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 그림처럼 내가 좋아하는 대상들로만 채운 주말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빛을 받으며, 내가 좋아하는 LP를 재생해 놓고 나의 귀에서부터 발끝까지 울리도록 헤드셋을 연결해 놓았다. 그리고 식빵을 굽고 있는 반려묘 옆에 온몸의 힘을 빼고 누워있다. 답답한 것은 하나도 없다. 좋아하는 차를 우려놓고 목을 축이곤 한다. 제한 없이 내가 원하는 음악을 장르 구분 없이 재생한다.
우리 모두의 주말엔 이런 모습이 잠시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빨리 흘러가고 많은 것들을 하기를 요구되는 세상에서 주말의 한 타임쯤은 이렇게 아무런 제약 없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시간과 공간을 채워도 되지 않을까? 그림은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확신을 주는 것 같다.
회사의 커미션을 받고 그린 그림들이 여기저기 캐비닛에 들어가 있다. 내가 본 전시회를 통틀어 가장 많이 커미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상업과 그림은 동떨어져야 할 존재라고 받아들여 왔기 때문에 더 그 간극이 크게 다가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커미션 작품일지라도 그 회사가 가진 역사와 목적을 재치 있게 극대화해 표현한다. 내가 커미션 맡긴 회사의 마케팅 부서라면, CEO라면 굉장히 만족했을 것임을 여러 그림을 보며 확신했다. 각 회사의 가치와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그림의 디테일로 완성된다.
외국어 학습 애플리케이션 '듀오링고'의 커미션으로, 2021년에 새롭게 추가된 '이디시어'를 홍보하는 차원에서 탄생했다. 작품 왼편은 유대인들이 이디시어 간판이 있는 거리에 모여있는 과거의 모습을 그렸다. 반대로 오른편에는 유대 요리 크니쉬를 판매하는 빵집이 있는 현재 뉴욕 맨해튼의 모습을 병치했다. 손을 맞대고 있는 두 주인공 중 오른쪽의 인물은 휴대전화를 통해 듀오링고를 이용하여 이디시어를 배운 사람으로 보인다.
문화가 이어지고 모어가 다른 이 일지라도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다리 역할로서의 듀오링고를 색다르게 표현하였다. 작가의 따뜻한 그림체가 어우러졌다. 대놓고 브랜드를 홍보하거나 알리는 것엔 요즘 들어 거부감이 많이 드는 사회에서 이렇게 따뜻한 그림을 활용해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것은 홍보하는 회사 입장에서도, 받아들이는 일반인 입장에서도 기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다란 작품을 한쪽에서 느리게 걸으면서 감상하니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활짝 핀 꽃들에서 느껴지는 생명력과 다양한 인물들의 행동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그림을 보면서 행복했다. 다른 작품들보다 유난히 이 작품을 보면서 이유 없이 그냥 모든 게 좋았다. 상큼하기도 하고 활력이 넘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양주 브랜드 '보베이 사파이어' 한정판 잉글리시 에스테이트 진을 위한 그림이다. 이렇게 기분 좋은 유료 광고는 처음 봐서 그런지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 진에 새롭게 첨가된 꽃, 식물들을 새겨넣고 일련의 연대기처럼 길게 작품을 뽑아내 오랫동안 사랑받는 브랜드를 표현했다. 싱그러움이 살아 숨 쉬며 모두에게 환영받는 이미지를 작가가 너무나 잘 담아냈다.
작가의 사고, 개성, 세계관, 생각을 표현한 그림도 많다. 어떤 이의 소설, 노래, 음악을 보고 영감을 받아 탄생시킨 여러 작품은 유기적인 연결로 더 확장되는 예술성을 와닿게 만든다.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자기만의 스타일로 그를 표현하고 자기만의 세계관을 덧붙여 또 다른 예술을 만들어 내는 작가의 또 다른 작품들을 더 기대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동명의 단편 소설을 차용한 작품이다. 소설의 내용을 기반으로 밀스타인은 자신만의 섬세한 방식을 살려 세계관을 확장했다. 소설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완벽한 그림이다. 상단 지배계층과 중하단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그들 사이엔 탐욕, 무절제, 쾌락, 폭력, 공격, 잔인함이 공존해 있다. 이 큰 작품에 묘사된 인물들을 하나하나 따져보며 감상하다 보면 인상이 찌푸려지다가도 이를 창작해 낸 작가의 큰 그림 그 자체에 감탄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구도와 이야기를 화폭에 담을 생각을 했을까 소름이 돋기도 했다. 무궁무진한 예술의 확장성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시를 보며 앞으로 한국 브랜드에서도 다양한 신진 작가들과의 협업으로 브랜드 메시지와 작가의 이야기를 동시에 표출해 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났다. 일리야 밀스타인 작가처럼 브랜드에 대한 복합적인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작가가 분명 많을 것 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상업적인 광고와 홍보에도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를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열려있는 기업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한국만의 우리 정서와 브랜드를 담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문학과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예술도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더더욱 알려지면서 사람들에게 큰 감탄을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가 소중히 일생에 거쳐 모아온 캐비닛을 열어보며 지금도 또 다른 공간에서 다양한 브랜드의 이야기와 작품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드로잉하고 있을 작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소중한 재능과 노력으로 만들어 낸 자신만의 무기를 커미션으로 세상에 더 알리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해 온 작가 일리야 밀스타인이 무척이나 멋지게 느껴졌다. 상업과 예술 간 벌어져 있던 간극이 전시회를 통해 좁혀졌고 또 다른 캐비닛을 열어볼 수 있길 기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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