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도 술빵, 한국어와 타밀어의 특수성 그리고 인도 특수학교 봉사활동기
인도 봉사활동 첫 날, 마더테레사 양로원을 오리엔테이션 겸 다녀온 우리는 학교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기숙사 음식에 대해 말하자면 특히 초반에 대체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그나마 점심 때는 탄두리 치킨이나 감자튀김과 같은 입에 맞는 음식들이 나왔다. 이들리(발효시킨 쌀과 껍질을 벗긴 렌틸콩 반죽을 쪄서 만든 빵)라는 살짝 쉰 술빵 맛이 나는 음식이 있었는데, 어느 날은 이들리에 처트니(인도 소스)만 나온 아침이 있었다.
좋은게 좋은거지라고 넘어가는 편(더 정확히는 컴플레인 마저 귀찮아하는 편)인 내가 봐도 심했다 싶은 비주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최소한 우리의 숙박비와 식비를 지불하고 온 만큼 우리의 권리를 주장해야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건 것 같다. '더 맛있는 음식을 달라' 라며 생존권을 주장하듯 진지한 자세로 건의를 했다. 한두 번 건의를 하니 식사는 점점 개선이 되어(혹은 내 입맛이 현지식에 적응을 했거나) 나중에는 배부름을 느낄만큼 맛있게 먹었다.
초창기 나는 아침에는 늘 준비돼있던 빵에 마트에서 산 누텔라 잼을 발라 먹었고 점심은 먹는둥 마는둥하다 과자로 연명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저녁 때는 늘 나오던 바나나만 먹고 잠에 들었다. 같이 간 친구들은 내가 과자만 안먹어도 5kg는 족히 빠졌을 것이라 말했지만 그 당시 나는 늘 당이 땡겼다.
다시 두 번째 봉사활동지로 출발했다. 일주일 간격으로 조가 바뀌었던 다른 두 기관과는 달리 매일 오후 방문했던 벳샨 스쿨(Bethshan Special School)에서 우리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벳샨스쿨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이다. 그런데 언어의 장벽 덕분인지 내게는 그 아이들이 여느 보통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고 오히려 선입견을 갖지 않고 아이들을 대할 수 있었다.
벳샨스쿨은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생~고등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이다 보니 우리가 준비한 프로그램을 아주 보람차게 진행할 수 있었다. 종이 접기, 그림그리기, 페이스페인팅, 한국 동요 부르기 등의 프로그램을 주로 진행했다. 특히 한국 동요의 경우 곰 세마리가 가장 인기가 좋았다. 그 이유는 '아빠' 곰 '엄마' 곰 구절 때문인데, 이 지역 언어인 타밀어에서 아빠, 엄마를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빠, 엄마라 부른다. 덕분에 아이들은 노래를 곧 잘 따라불렀고, 우리는 우리 모국어 덕 좀 봤다며 뿌듯해했다.
나는 이름으로 인도어 덕도 좀 봤다. 봉사를 하는 우리들 중 아이들이 가장 잘 외운 이름이 바로 내 이름이었다. 외국인들에게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탓에 편의상 외국인 친구들에게 Jinny라고 나를 소개하는데, 마침 인도의 공용어인 힌디어로 설탕이 치니(Chini)여서 벳샨스쿨 아이들은 물론이고 같이 기숙사에 머무르는 친구들도 내 이름을 쉽게 기억했다.
한국어와 타밀어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꽤 여러 학자분들이 연구해 온 것으로 안다. 과거 허황후(허황옥)라는 인도 아유타국 출신 공주가 우리나라 삼국시대 때 금관가야 수로왕과 결혼을 했고, 그로 인한 한-인도의 교류설이 타밀어와 한국어가 유사한 이유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추후 다시 인도로 와 영사관 인턴을 하며 한-인도 문화, 언어의 유사성에 관한 학술 포럼을 진행하기도 했고, 한국에서 손님이 방문하실 때마다 내 상사분이 아이스브레이킹용으로 즐겨 말씀하시던 스토리가 이 '허황후' 스토리였다.
벳산스쿨 학생들은 한 명 한 명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가 없었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도 그 아이들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들이지만 모두들 저마다의 개성도 주관도 뚜렷했다.
그 중 유독 친해진, 시크한 똑쟁이 마디쉬(Madesh)라는 친구는 수학을 아주 잘했다. 그리고 영어도 곧잘했다. 10단 이상의 곱하기를 가르치면 곧 잘 따라오는 친구가 신기해 나는 더욱 붙들어 앉혀놓고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 친구에게 이것 저것 알려주며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고, 시크하던 마데쉬는 점점 내게 마음을 열고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다른 한 친구는 나를 가장 잘 따르던 두레이(Durai)라는 학생이었는데, 하루 종일 본인 이름 쓰는 법을 알려줘도 다음 날이면 모두 잊어버리는 그러면서도 내 이름은 귀신같이 기억하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사진 찍는 건 또 어찌나 좋아하는지, 지금도 내 앨범에 있는 그 당시 사진 중 상당한 용량을 이 친구가 차지하고 있다.
내게 벳샨 스쿨은 다른 의미의 스페셜 스쿨이다. 내게 그 곳 아이들은 정말 특별한 존재가 되어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때를 추억하고 또 추억했다. 마지막 날, 두 아이가 내게 편지와 반지를 선물했다. 길지는 않지만 정성스레 쓴 편지와 함께 연락하고 지내자며 메일주소를 적어준 마데쉬(한국에 돌아와 메일을 보내봤으나, 메일 주소가 잘못된 것인지 답장은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절친이 된 두레이는 10루피(한화 약 170원)를 주고 반지를 사와 고사리같은 손으로 반지를 내게 선물했다.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아이들 덕분에 우리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이별을 했다. 지금쯤 훌쩍 커버려 어느덧 성인이 되었을 아이들이 보고싶고 또 궁금하다. 진부하지만 꽃 길만 걷기를. 험난한 세상이지만 그 누구보다 순탄한 인생이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