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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음악 여행

류이치 사카모토의 <Aqua>

by 새로나무

거실 왼편 한 구석에서 출발한 그의 피아노 선율이 벽과 천장과 공기를 타고 내 귓가에 도달하기까지 아득한 시간이 흐른다. 자비롭고 고마우며 마음에 감동을 주는 상태로서의 <은혜로움>에 근접한 음악이다. 자연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우주에 대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칭찬하고 드높이는 느낌이 드는 음악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깊이깊이 내려가며 빠져든다. 수심이 얼마나 깊은지 끝을 헤아릴 수가 없고, 표상하는 넓이가 얼마나 커지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다. 음과 음사이의 여백이 안내하는 끝 모를 고요함 속에서 내면의 평화와 안식을 맞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선율에 내 몸과 내 마음을 맡기고 그 선율에 크게 기대어 편히 쉬는 것이다.

1999년 앨범 BTTB(Back To The Basics) 수록곡으로 미니멀리즘적인 피아노가 중심이다. 멜로디의 간결함은 시간과 공간의 여백을 만들고, 이는 내면으로 향하게 만든다. 일정한 템포 없이 흐르듯 진행되며, 바다의 잔물결 혹은 새벽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감정의 흐름을 만들어준다. 피아노의 울림은 여운을 담아 명상적이다. 비교하는 것의 허망함에 대해 깊이 깨닫고 있다. 이 곡만큼은 어떤 장르의 테두리에 가둘 수 없어 보인다.

Aqua는 라틴어로 '물'을 뜻하며, 고대로부터 물은 영혼을 씻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물처럼 흐르는 음악은 고정된 감정을 주입하지 않고, 내면의 감각을 따라 흐르게 된다. 소백산 계곡의 맑은 시냇물, 설악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물, 구례 어느 식당을 따라 흐르던 강물, 황지연못의 맑은 물, 레만호와 루체른 호수의 물, 로렐라이 언덕을 따라 내려오던 강물, 센강과 템즈강과 아마존과 나이아 가라 폭포 등 내가 경험했거나 경험하지 못했지만 영상으로 만났던 그 모든 물에 관한 추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내 몸을 적셔 주는 물 한 잔, 약초를 우려낸 차 한잔, 구수한 커피 한 잔.... 그 물방울 그 속에 가득히 담겨 있는 물 분자들을 본다. H2O. H2O. H2O. H2O. H2O. H2O. H2O. H2O. H2O. H2O. H2O. H2O. H2O. H2O.

그 작은 것들이 내 몸에 미치는 영향을 상상한다. 내 몸과 물 분자는 한 몸이다. 내 몸 안에 깊숙이 들어와 평생을 같이 살아간다. 내가 물 분자 안에 있다. 서로의 존재가 영향을 주고받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깊은 인연의 끈을 선율 속에서 발견한다. 그 합쳐진 힘이 향하는 미세하고 거대한 미지의 세계가 주는 설렘이 물 안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물들이 지금 이 선율을 따라 발끝과 손끝에서 시작해 온몸 구석구석 흐른다. 잠시 묵은 것들이 밀려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곧 다른 것들이 묵혀지겠지만.... 몸과 마음이 하나로 머물 수 있도록 독려를 받는다. 그리고 다시 나는 심해로 빠진다. 그렇게 류이치사카모토는 끊임없이 심해 혹은 심연으로 내려갈 것을 주문한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끊임없는 순환, 그것이 가져다주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그 에너지 위에 내가 살고 나 또한 그 에너지에 힘을 보탠다.


사카모토의 음악이 나오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만든 생태계위에 그의 음악이 있다. 잠시 평화로움과 힘을 주는 그의 음악은 그 모든 선배들의 음악이 응축된 것. 나라나 장르에 머물지 않는 이미지가 선명하다. 음악을 들으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주는 음악의 힘, 사카모토에서 시작되었지만 음악 전체를 예찬하는 이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지금 여기 이 공간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지구라는 별, 우주 속에서 나로 존재하는 것이 기적이다. 그 기적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그의 곡에 내 몸을 맡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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