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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서 3일 : #9 매력적인 산책로

by 새로나무


먹고 마시는 행위 뒤에 느긋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고, 느긋하게 산책하는 것은 더 좋다. 포만감과 만족감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소화를 위해 위장으로 혈류가 몰려야 하는데, 이때 신체 활동이 많으면 혈류가 분산되어 소화 기능이 저하될 수 있어서 정적 상태 유지가 소화를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식후 산책은 말초 근육의 당 흡수를 자극하여 인슐린 의존 없이 혈당을 낮추는 데 도움을 준다. 걷는 동작은 위장 운동을 촉진하여 음식의 위 배출 속도를 증가시킨다. 산책은 자연 노출이나 햇빛 흡수를 통해 세로토닌 분비를 증가시키며 기분 개선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준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각기 좋은 점이 있고, 따라서 부담 없이 선택하면 그만이다.


당장의 휴식보다는 느긋한 산책을 선택했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걸으면, 발바닥에 풍경과 바람과 느낌이 새겨진다. 될 수 있으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겨두고 싶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정신적 문화의 뿌리가 어디일까 생각해 보면, 사지선다나 정답과 오답이라는 어릴 적 학습에 길들여진 것도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미디어와 정치세력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다. 분열과 갈등을 은근히 조장하면서 갈라 치기를 통해 자신들은 반사이익을 얻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처와 분노의 감정을 얻게 된다. 제로섬 게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2010년 워싱턴 출장 중 사학과 64학번 대선배님 댁에서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워싱턴 교외의 풍경이 너무 좋아서 샌프란시스코보다 여기가 좋다고 말씀드렸다가 제대로 혼났다. 선배님께서는 샌프란시스코는 샌프란시스코 대로 좋고, 워싱턴은 워싱턴 대로 좋지 그걸 왜 서로 비교해야 하느냐라는 말씀이 죽비처럼 내게 떨어졌다. 생활 속에서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한다. 비교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행복을 줄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저 앞의 Liberty Bridge가 보일 때부터 생리적인 신호가 왔다. 장내 미생물의 먹이가 될만한 음식을 선호하는 식습관으로 바꾸면서 장의 평화가 여행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난 뒤의 뒷감당은 조절이 쉽지 않다. 시원하고 달콤한 맥주를 양껏 마시는 것과 그 뒤 감당해야 할 생리적 현상 사이의 갈등은 평생 서로 힘겨루기를 할 것 같다.


힘들게 다리를 지나 그레이트 마켓 홀에 도착하여 딸에게 현금 1000 포린트를 빌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300 포린트, 비엔나에서도 화장실은 0.5유로, 이곳이 조금 더 비싸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공 화장실 이용 요금은 0.5~1.5유로 정도다. 위생 유지, 청소 인건비, 시설 관리 등을 위한 일종의 사용자 부담금인데, 늘 비용 없이 공중화장실을 이용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문화다. 기차역 화장실이 대부분 유료로 운영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레이트 마켓 홀 과일가게에서 처음 본 과일인 다마손 자두를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한국 여성여행객께서 사신다음 두 개를 건네주시며 먹어보라고 하셨다. 유럽을 두 달째 여행 중이시라고 한다. 감사의 인사와 남은 여행 멋진 시간 보내시라는 덕담을 나눈 뒤 오면서 한 입 베어 물었다. 국산 자두 같은 상큼함을 기대했는데 약간 시고 텁텁한 과육의 은근한 단맛을 볼 수 있었다. 문득 대구 근처 선산을 지날 때 자두꽃밭을 지나친 적이 있다. 초록빛 자두꽃은 하얀 배꽃만큼이나 예뻤었다. 다마손은 열매를 맺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구절 하나를 검색했다.


"자두를 심는 자는

아들을 위해 식물을 심고,
다마손을 심는 자는
손자를 위해 식물을 심는다."



다양한 가게가 양쪽으로 즐비한 이 거리는 매력적이다. 젤라토가게에 들러 바닐라 맛을 주문했다. ‘젤라토(Gelato)’는 이탈리아어로 ‘얼린(frozen)’이라는 뜻을 가진 gelare에서 유래한, 이탈리아 전통의 아이스크림으로, 낮은 지방 함량과 부드럽고 진한 맛이 특징이다. 젤라토와 아이스크림은 어떻게 다른가? 지방함량과 공기 함량 그리고 서빙 온도가 다르다. 젤라토는 짠 득하면서도 깊고 조밀하게 진한 맛을 선사한다. 반면 유럽과 미국에서 발전시킨 아이스크림은 그동안 내가 맛봐온 그대로 부드럽고 시원하고 달콤하다.


문득 시간을 거슬러 1974년 내가 살던 도계역에서, 어머님과 처음 기차를 타고 인근의 신기라는 곳으로 갔었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해태 브라보콘을 처음 먹었는데, 바닐라 향기와 맛을 잊을 수 없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면 언제나 바닐라맛을 선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깨끗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면서도 은근한 향으로 몸을 위로하는 그 맛 위로 선선한 바람이 빰을 스치고 지나간다.


성이슈트반 대성당 문 닫는 시간이 겨우 45분 남았다. 파이프오르간의 연주와 합창이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어느 나라건 어딜 가건, 성당에만 들어가 만 아늑하고 평화롭다. 사연과 서사를 간직한 사람들이 공을 들여 지었던 계획의 숭고함이 주는 느낌, 오랫동안 사람들이 기도한 흔적들이 쌓아둔 에너지 혹은 기운이 감싸는 느낌의 변주가 몸과 마음을 감싼다. 횡격막 호흡을 하며 눈을 감자 졸림과 아늑함이 찾아온다. 바흐의 음악이 성당 벽면을 타고 자장가처럼 내 귀에 와닿는다. 짧은 시간, 영원처럼 긴 느낌이 밀려온다. 평화와 안식, 영원처럼 편안함 속에 작은 기도 하나 올린다.

어렵게 느껴지는 리스트 음악을 비교적 늦게 접했다. 물론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리스트 피아노협주곡 1번은 자주 듣긴 했지만, 임윤찬을 통해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Transcendental Etudes의 매력과 에너지를 떠올리면, 부다페스트 혹은 헝가리의 매력의 축소판이 아닐까?

숙소에 도착한 뒤, 약간은 피곤했지만 부다페스트에서의 남은 밤이 아쉬워 숙소 근처를 걷다가 TAPAS가게에 앉았다. 절인 샐러드와 문어 요리를 주문했다. 에스트렐라 생맥주는 신선한 바디감과 상큼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문어 요리와 너무 잘 어울렸다. 문어의 부드러운 식감과 잘 어울린 소스의 조화 속에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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