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B(Österreichische Bundesbahnen)는 레지오젯보다 훨씬 비싼데, 마치 주식시장처럼 예약하는 타이밍에 따라 요금이 수시로 변동한다. 비엔나와 프라하와 부다페스트를 거치면서 자투리 시간 날 때마다 들락날락 거리며 적당한 요금을 노려보다가 불과 며칠 전 가장 싼 값이라 생각되는 지점에서 예매했다. 스스로 많이 칭찬해 주었다. 좌석 없으면 어쩌려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날씨가 흐린 덕분에 사람들이 많지 않아 2등석이지만 편안하게 차창밖 풍경을 감상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하는데 문득 그 너머 기억의 저편으로 여행하라고 내면에서 속삭인다. 멀리 보이는 것들은 천천히 다가왔다가 천천히 사라지고, 눈앞의 사물들은 휙휙 지나친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벌어지는 풍경 속에 가슴 한편 내 삶 속에서 작은 낭만적인 서사가 펼쳐졌었음을 떠올린다. 그래서 너에게 기차는 어떤 존재냐고?
처음 기차를 타고 아주 짧은 구간을 갈 때의 신기함, 터널을 수십 개씩 헤어리던 기억, 추석을 맞아 집으로 향하는 기차 안 잠시 전등이 나가는 해프닝이 벌어졌을 때 달빛을 벗 삼아 내달리던 차창밖 풍경들이 되살아온다. 대학 다닐 때 자주 이용하던 야간열차와 잠시 들러 먹던 가락국수의 따뜻한 국물맛과 싸한 밤공기. 기차는 단순히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는 수단 이상의 무엇이 실려있다.
은하철도 999에서 처럼 별과 별을 연결하는 상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아스라한 노스탤지어가 같이 실려있다. <박하사탕>에서는 시간여행의 매개체가 되기도 하고, <필론의 돼지>에서는 공동으로 피해를 보는 피해 운명공동체가 되기도 한다. <러브레터>에서는 아스라한 눈밭과 사랑의 감정을 흩뿌리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상하이에서 만났던 회사 직원의 경험에 의하면, 기차는 명절날 서른세 시간을 달리는 설렘과 지루함과 비좁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안정적으로 흔들리는 차창밖과 객차 안의 거리는 짧고 빠르게 지나치는 그 순간의 구도속에 만감이 교차하는 매력은 기차에서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로마 때부터 만들어진 유서 깊은 도시, 암염 광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잘츠부르크. '잘츠(Salz)'는 독일어로 소금을 의미하니 직역하면 '소금성'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란 단어를 들은 지 수십 년 만에 이 도시를 향하게 된다. 2023년 15만 명 인구에 2,93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곳,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태어난 곳. 사운드 오브 뮤직 실제 배경(촬영지)이기도 하다. 기차역 안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잘츠부르크 카드 24시간짜리를 구입했다. 대중교통과 주요 관광지를 유효시간 동안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터스베르크행 버스에 올랐다.
세월이 흐르면서 버스를 타거나 전철 혹은 기차를 탈 때 쉽게 잠이 온다. 짧게는 2-3분에서 길게는 30분 정도 잠을 자는데, 자고 나면 예외 없이 세포 전체가 새로 태어나는 느낌을 받는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신선하고 모든 사물들이 명확하게 보인다. 머릿속은 더없이 맑아져서 책을 읽는 집중력이 두세 배 상승하는 느낌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근력운동과 유산소운동의 영향에 더해 당질이 포함된 탄수화물이나 활성 글루텐이 포함된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면서 생긴 변화다. 자고 일어나 주변 풍경을 보면서 잘츠부르크 마을을 지나는 길들이 몸 안으로 밀려들어와 더없이 아늑하다. 오랜 세월 사람들이 지나갔던 길, 자연이 만들어낸 풍화 속 형태들과 눈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에 위치한 운터스베르크는 1900미터다. 전망대행 케이블카는 1961년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자욱해서인지는 몰라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식구들만 달랑 태우고 케이블카가 출발한다. 1300미터를 올라가는 케이블카는 속도가 빨랐다. 안개가 끼어서 높이 공포는 덜하다. 스위스 리기산을 케이블카로 올라간 경험 덕분에 덜 공포스럽다. 유사한 경험은 편도체의 민감함을 떨어뜨려 공포의 강도를 누그러뜨린다.
안갯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진기행>이다. 무진은 안개가 자욱한 도시로, 현실에서 벗어난 몽환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 무진에서의 며칠간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며 자아와 사회적 가면 사이의 충돌을 경험을 하고, 결국 주인공은 무진을 떠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안개는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케이블카선만 보이는 안개숲에서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탄생했다가 사라진 운터스베르크의 숲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숲의 정령을 떠올리면서 다시 돌아가야 할 일상에 대한 생각 따위는 잠시 접어두고.....
안개가 감싸고 있는 전망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혼자 왔다면 틀림없이 안개를 안주삼아 적어도 1시간 이상은 생맥주를 마셨을 텐데, 식구들과 함께 온 이상 그런 무책임한 행동을 할 수는 없다. 내려가는 케이블카의 속도감과 다시 마주한 안개숲 그리고 숲의 정령들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한다. 안개숲을 헤치고 나오자 마을의 집들의 색감과 구도, 길과 잔디, 숲의 색색들이 선명하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경계선이 이렇게 명쾌하다면 좋을 텐데, 삶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도 희미하다. 안개숲과 마을사이 선명한 경계선을 선물로 간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