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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엔나 3일 : #4 시간 여행

by 새로나무

비엔나를 여러 번 방문한다고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도시가 형성된 역사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직선적인 시간에 덧붙여 수많은 휘어진 시간들, 공간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볼 수 있는 것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만 느끼는 게 여행에서 얻는 선물들이다. 그러므로 나만의 여행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접점을 만들어내고 느끼느냐도 중요하다.


남들의 여행 이야기는 참고사항이다. 물론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자신만의 여행스타일을 만들 수 있지만, 한번 사는 인생, 자주 가보지 못할 곳에 갈 때 남들의 코스를 따라간다면 아쉬움이 더 클 수 있을 것이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욕심을 내려놓고 볼 수 있는 것만 보자고 하니 마음이 더 편해진다. 마치 밀린 숙제를 해야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돌건물 앞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던 과거가 회상된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허망한 사진들을 계속 만든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의 관점, 나만의 시선, 내가 어떻게 느낄 것인가? 어떻게 그 도시와 호흡할 것인가? 그게 앞으로의 화두다.

괴테의 동상과 모짜르트의 동상앞에서 20대에 접했던 기억의 조각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1996년 겨울 대학입시 접수창구를 지키고 있다가, 한산한 틈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펼쳤다. 접수하는 학생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오는 덕분에 글을 읽다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 몸을 움직이며 원서 접수를 했다가 한산할 때 책을 펼쳐드는 일을 반복했다. 난해한 그의 책은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잘 들어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물리적으로는 끝까지 다 읽었다. 언젠가 다시 펼쳐들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고전을 읽으려면, 상당한 에너지 소모와 단단한 각오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지나치면서도 <파우스트>에는 눈길이 좀처럼 가지 않았다.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 그레첸과 헬라 나와의 비극적인 사랑, 구원 등 주제가 무겁고,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될 것 같아서. 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비롯해 그는 어디서건 불쑥 나타나곤 했다. 이렇게 그의 동상을 마주 대하니 다시금 그의 작품을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글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까?

1983년 10월 동생을 상실한 아픔은 오래갔다. 부모님의 고통을 보면서 대학교 입시 준비에 몰입해야 했기에 유보해 두었던 슬픔을 대학 입학 후 다시 꺼내 보았다. 동생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그 의미를 찾는 일들은 만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여행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자 나의 기억과 나의 현재와의 대화다. 기억을 인출하는 과정에 여행이 개입되어 내 삶의 경험이 더 깊고 넓어지는 계기다. 그때 나의 슬픔과 혼란을 잠재워주었던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만난 건 행운이다. 물론 그 음악의 깊이를 알아보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분명히 모차르트의 음악은 나를 위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생이 영원한 안식을 갖게 될 거란 위로의 느낌도 함께 받았다.


카라얀 버전의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져서 같은 테이프를 한번 더 샀다. 모차르트는 애초 이 곡에 대한 의뢰를 받고 작곡했으나, 작업을 하던 중 세상을 떠나 그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팍팍한 삶에 힘과 위로가 되는 음악을 만드는 영역은 천재들의 몫이고 천재 하면 떠올리게 되는 모차르트. 때로는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처럼.....

큰 딸과 부다페스트 합류 후 다시 찾은 비엔나.... 지난번에 다녀갔던 <EPOS>를 다시 찾았다. 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로 맥주를 그것도 생맥주를 꼽는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왔던 오랜 과정과 전통 그리고 그 사이 시민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성당이나 교회를 운영하려고 했던 탐구심 강한 수도사들의 노력이 빚어낸 빛 깔고 깊이 녹아들어 있는 맛. 맥주맛을 내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그대로 녹아있는 생맥주의 첫 한 모금을 깊이 음미한다. 라거 특유의 시원하게 밀려오는 파도 같은 힘과 짜릿한 목 넘김, 그 뒤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옅은 알딸딸함이 온몸을 감싼다.


첫 잔속에 흘러온 과거의 흔적을 발견한다. 도대체 이 짜릿하고 시원한 맛을 어떻게 발견한 건가? 단순히 갈증을 해결할 목적에만 머물지 않고 뭔가 더 높은 차원의 생각과 노력이 결합되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신기한 맛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가볍지 않은 바디감은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실려 있음을 한 층 더 실감하게 해 준다.


두 번째 잔에서 온전한 맛을 음미한다. 셋째 잔에서 기분 좋은 취기를 만나는 이 미묘한 메커니즘을 만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사람들한테 신세 지고 있으며, 그 신세를 통해 작은 행복과 즐거움을 만끽한다. 내가 보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것들 속에는 그 신세 짐이 들어있다. 지금 이 순간, 은은한 황금빛깔이 찬란하게 빛난다.

두툼한 오징어 요리, 맛있어서 한 접시 더 주문했다. 1.5배 양이 늘었다. 주인장께서 우리를 기억해 냈음이 분명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들이 나는 너무 좋다. 연어와 양고기 요리를 먹으며, 바다와 육지와의 조화로움을 장에게 선물한다. 살아있는 생명이 죽어 살아있는 나를 먹이는 이 과정의 경이로움을 바라본다. 양을 잡는 잔인함과 고기를 발라내는 노동, 오징어와 연어를 잡는 위험과 수고로움을 생략한 채 안락한 의자에 앉아 맛을 음미하는 호사를 누린다.


혈당스파이크, 인슐린 저항 증후군, 장내 미생물에 대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샐러드를 비롯한 채소를 먼저 먹고 단백질 이어서 탄수화물을 먹는 순서가 합리적이다. 천천히 먹게 되고, 쉽게 허기지지 않으면서 몸의 균형을 유지해 줘서 여행 내내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준다.


요리의 형태는 어느 순간 완성되었을 터인데, 완성되기 전의 시행착오와 완성된 뒤 그 형태와 맛을 지키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에 덧붙여, 신선한 식재료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들이 음식의 맛을 더 높여준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부단한 노력이 지금 나에게 정리정돈된 형태의 음식으로 대접받는다.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던 과거의 시간들이 지금 이 음식 속에 스며들어 내게 말을 걸고 있고 그 말에 맛을 음미함으로 화답한다. 새로운 맛을 음미하는 동시에 맛보았던 기억들을 소환하는 과정이 서로 얽혀 취기와 잘 어우러지면서 빈의 밤은 깊어간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쾌적한 전철을 타고 호텔에 도착하여 따님들과 헤어지고 난 뒤의 아쉬움에게 한번 더 말을 걸어보았다. 호텔로비에 SNOW라는 아주 자그마한 펍을 소개해 준다. 1860년에 문을 연 브루어리. 일상에서 벗어나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맞는 맑은 황금빛깔은 나를 행복으로 안내한다. 언제까지 생맥주를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지금 현재 나와 마주하고 있는 황금색깔의 매력에 깊이 빠져 든다. 금색이라고 하기에는 덜 화려 하지만, 깨끗하고 맑은 색깔이 가져다주는 신선함, 차갑게 혀끝에 닿는 라거의 맑고도 투명한 맛.


이틀밖에 남지 않은 일정의 아쉬움을 담는다.

마시고 나면 아쉬움은 사라진다.

그게 맥주의 매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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