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츠부르크 시내행 버스에서 으스스했던 몸을 녹이고 나른해질 즈음, 내려 잘츠부르크 성으로 향했다. 날씨가 흐리고 약하게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원근감이 떨어져서 멀어 보이지 않았기에 잠깐 걸어가면 될 줄 알았다. 생각보다 경사가 가파른데 나만 생각하며 걷다 보니 식구들의 체력 소모를 배려하지 못했다. 잠시 쉬어가는 언덕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마을과 성 사이의 경계지점에 있었다. 마을 어귀에 큰 나무가 한 두 그루 가 수호신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이 나무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으리라.
호엔잘츠부르크 성(Hohensalzburg Fortress)은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요새 중 하나로, 1077년 주교 게브하르트(Gebhard von Helfenstein)가 성의 초석을 다졌다고 한다. 성 전체는 약 250미터 길이에 150미터 너비로 오스트리아 내에서 가장 크고,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중세 성곽인데, 그 목적이 다채롭다. 방어용 요새이자, 대주교들의 거주지이며,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었단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사이의 권력투쟁(이른바 "서임권 분쟁")의 여파로 건설되기 시작해서,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는 교황 편에 섰고, 황제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해 요새 건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대주교 레오폴트 폰 케인(Leopold von Keutschach)의 시대(1495–1519)에 현재 모습의 대부분이 완성되었고, 이 시기 성은 단순한 방어 요새를 넘어 대주교의 궁전으로서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으며, 내부에 궁전, 성당, 연회장, 골동품 수집실 등 고위 성직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이 포함되었다. 1618~1648년의 종교 전쟁 기간 동안 성은 한층 더 요새화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성은 실제 전투에 휘말린 적은 거의 없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성은 군사적 기능을 잃고,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부각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 콘서트홀,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매년 여름 열리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주요 배경 중 하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간 성에서 시내 쪽은 안개와 여린 빗줄기로 제대로 된 경치를 감상하지 못했다. 흙바닥이 주는 감성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낯설다. 평소에는 흙에서 벗어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바닥의 비자연성을 개탄하다가 막상 흙바닥을 걷는 불편함 앞에서고 보니 스스로 간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성 곳곳에 오랜 세월의 흔적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사람의 흔적이 자연과 어울리기도 하고, 자연을 지우기도 하듯, 자연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여기서 무얼 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보다 훨씬 더디게 흘렀을 것이다. 더딘 시간 속에서 다듬었던 성. 삶의 흔적들과 잊힌 이야기들, 말이나 글로 가 닿지 않는 곳을 보는 즐거움을 저 작은 창너머에서 건져 올린다.
다들 힘들어하길래 눈치껏 살펴보는데 내려가는 전차 타는 입구를 발견했다. 잘츠부르크 24 카드로 탑승했다. 올라올 때 이걸 타고 왔으면 덜 눈치 보는 건데, 계획적이지 못한 나의 불찰을 조심스럽게 탓하며 편안하게 내려간다. 다들 표정이 밝아졌고, 광장에서 성을 배경으로 멋진 포즈를 취할 때 우울하고 힘들었던 기분은 모두 완전히 풀렸다. 뭔가를 먹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부지런히 식사장소를 찾았다. 꽤 오래된 식당을 발견했다. 아니 검색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기에는 너무들 지쳤다.
미리 찾아두면 헤매지 않아서 좋고, 그곳에서 찾으면 뜻밖의 선물을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어서 좋다. Zwettler's Wirthaus. 1863년부터 이어져 온 전통 가정식이라. 1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식재료를 공급했던 사람들, 주방을 설계하고 고쳤던 사람들, 뜨거운 열기 속에 식재료를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하고 연구했던 사람들, 갓 나온 음식을 기분 좋게 서빙했던 사람들, 그 음식을 기대와 설렘 속에서 음미했던 사람들, 구시렁거리며 맛을 품평했던 사람들, 감사의 인사를 주고받던 사람들의 거대한 물결이 내가 앉은 식탁 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세월이 우리에게 가져가는 것도 있지만 축적된 시간이 우리에게 지금처럼 큰 선물보따리를 풀어놓을 수도 있다................................................................ 기대된다.
'Grandmother's soup'이라는 이름에 끌렸다. 속마음을 내놓지 않고 행동으로 손자 손녀 사랑을 보여주셨던 수많은 할머니들의 손길이 연상된다. 국물은 따뜻하고 깊고 아늑했다. 적어도 수심 100m 언저리까지 내려가서 바닥을 확인할 수 있는 근원적인 맛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먹어본 듯한 편안한 느낌이 입안에 옅게 옅게 퍼진다. 뇌 저 한구석에서 잠자고 있는 오래된 기억을 이 음식이 소환했다. 어느 때 어느 곳인지 어느 가게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내가 느껴던 맛이 소환되었다. 수프 한 술에 이 가게의 내공과 음식 솜씨를 확인하고 나니 모든 메뉴가 궁금해졌다. 낯선 곳의 음식점에서 예상했던 내용과 일치하거나 더 높은 퀄리티를 만나게 되면 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기쁘다. 작은 기쁨과 작은 행복을 발견하는 것은 여행과 일상의 삶 모두에서 거둘 수 있는 작은 승리다.
축축 처지는 날씨라 목이 마르던 차에 품위와 위엄을 갖춘 도자기잔에 실려온 Local Draft Beer, Kaiser Karl 라거는 약간 묵직한 시원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소규모 개인 양조장에서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며, 숙성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있고, 특히 밀맥주는 전통적인 병발효 방식으로 양조된다고 한다. 질릴 수 없는 투명하고 맑고 깨끗한 맛, 그러니 맥주는 진리다.
튀긴 요리는 그동안 자제했었는데, 왠지 맛있을 것 같은 예감에 모두의 동의절차를 거쳐 과감히 질렀다. 지금의 바삭하고 촉촉한 맛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맛에 의해 영점조정되었으리라. 기름기 별로 없는 담백함에 맥주가 잘 어울린다. 소꼬리찜은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로, 루꼴라와 당근은 색감과 코디 모두 훌륭하다. 소꼬리의 부드러운 살결과 특유의 소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샐러드를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양과 질 모두 훌륭한 식사다. 수프를 하나 더 주문하고 마무리는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디저트.
그동안 팁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마무리 시점에 팁의 %를 입력해 달라는 요청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냥 내가 결정하고 5%든 10%든 주면 그만인 것을…. 의견을 물어보니 다들 안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적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뒤로 하고 가게를 나오는 내내 찝찝한 기분이었으나 그렇다고 훌륭한 식사의 추억을 덮지는 않았다. 나중에 여기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한번 더 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