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벨베데레 궁전 - 아름다운 전망이란 뜻
프린츠 오이겐 사보이(Prince Eugene of Savoy, 1663~1736)를 위해 건축, 왕자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승리로, 자신의 성공과 지위를 반영할 수 있는 별장,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kas von Hildebrandt)를 고용, 1714년에서 1723년 사이에 건축된 바로크 양식, 화려함과 대칭미, 정원 설계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먼저 건축된 하궁(Lower Belvedere)은 1714년에 완성되었고 오이겐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1723년 완성된 상궁(Upper Belvedere)은 더 화려하고 웅장한 공간이다. 벨베데레의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전망(Bella Veduta)"이라는 뜻으로, 궁전이 위치한 곳에서 비엔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점에서 유래했다.
상궁에 위치한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은 두 번째 방문이다. 공사가 진행 중이지만, 입장이 가능했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건, 위가 둥그렇게 휘어진 기둥이다. 뭔가를 연결하는 관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잠시 서있는 동안 새로운 세계로 가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라는 소재는 오랫동안 수많은 예술가들이 다뤘을 것이다. 내가 봤던 작품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기존에 봐왔던 작품들과 달라 보였다. 아니 내가 그동안 작품들을 눈여겨보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모든 작품들을 카메라에 옮기고자 하는 나의 열망과 시간은 반비례한다. 사진으로 옮겨놓은 뒤 눈여겨본 경험이 많지 않아서다. 책도 마찬가지로, 일단 사는데 방점을 두고 읽는 것은 뒤로 미뤄왔다.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그렇게 하지 말자고 다짐을 해본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작품들을 다룰 수는 없지만, 몇몇 작품이라도 마음속에 떠오른 예술적 심상을 정리해 보자고 다짐한다.
화려한 금발의 예수상보다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인상에 가깝게 소박하게 묘사된 작품들이나, 성모와 같이 있는 아기예수의 모습에 더 끌린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 성모에게 안겨있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한동안 멍하니 봤었다. 삶과 삶 사이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와 산 자와 죽은 자의 교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특별한 순간들을 포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지만 가 닿기 어려운 세계에 대해 그저 상상해 보거나 당시의 현실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보는 것. 그러다가 <몬트리올 예수>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예수의 이미지를 오버랩시킨다. 잠시나마 그 작품들이 주는 느낌 속에서 침묵하면서 뭔가 신성한 기운을 느껴보려고 노력한다.
클림트의 <키스>는 워낙 유명해서, 사람들도 많고 잠시의 틈을 셀카를 찍어 도저히 찬찬히 감상할 엄두가 나지 않아 스쳐 지나갔다. 인물화들을 지나쳐 <개양귀비 들판>과 <캄머성 공원의 산책로>와 같은 자연풍경이 담긴 작품들을 보았다. 색감이 너무 화려하고 섬세한 붓터치의 흔적을 살펴본다. 정면에서 옆면에서 약간 위에서 약간 아래에서 각각의 각도에 따라 그 터치의 질감은 조금씩 다르다. 고흐의 작품에서 보였던 원색의 출렁임들이 이어지고 있어서, 한 사람의 그림은 한 사람의 그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에게로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색들의 향연 속으로 잠시 몰입하는 동안 그림 한 점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효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1년 365일 오가면서 받을 그 위로와 평안, 끊임없이 사람들 뇌리 속에서 재연되고 또 다른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줘서 새로운 작품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문을 만드는 작업이다. 각각의 그림들은 새로운 문이며 그 문을 통해 작가의 생각과 느낌이 전달되고 그 작품들이 또 다른 작가들을 만들어내고 나와 같이 잠시 그림을 보고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으니....
에곤 실레도 당대 주목을 받은 화가로 클림트와는 달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욕망과 고통과 행복을 있는 그대로 꿈틀거리듯 꺼내서 날 것으로 보여주는 단면을 본다. 전시된 작품은 아니지만, 15살에 그가 그린 풍경화를 보면 멋진 천재성이 번득인다. 자화상의 강렬한 눈빛과 꿈틀거림 속에 그가 본 자신의 모습은 무엇이었을지 ….
클림트와는 다른 사랑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고, 미래의 행복한 가정을 보여주는 저 생동감 넘치는 그림은 오래도록 뇌리에 깊이 남을 것이다. 세포가 꿈틀거리는 것을 시각으로 볼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28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클림트와 실레는 서로 예술적 공감대를 형성한 스승과 제자 혹은 동료로서의 관계를 유지했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나는 요즘 뜻 맞는 사람과 사람사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다. 세월의 무게를 걷어내고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뜻을 말하고 서로 존중하며, 새로운 미래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같은 연배의 사람들로 모수를 좁히면 그 비좁은 환경에서 뜻 맞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아주 작고 소소한 미래를 꿈꾸는 일조차도 나이나 환경이나 학교 등에 얽매여 그 너머로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클림트와 실레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들의 작품을 둘러보면서 좀 더 개방적이고, 좀 더 내려놓고 좀 더 경계를 허물 용기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