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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finder Aug 28. 2020

영화 <미성년>: 애들이 무슨 잘못이야

'미성년' 같은 어른들, '어른' 같은 미성년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보기 싫은 사람을 피할 수 없는 곳에서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속담이다. 많은 이들이 속담에 공감할 것이다. 흔히 '전 애인'처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한두명쯤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미성년>의 두 주인공, 주리와 윤아에 비하면 EX를 만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주리 입장에서 같은학교 동기 윤아는 아빠와 바람난 여자의 딸이기 때문이다.



⚠️ 이하 리뷰엔 스포가 있습니다 ⚠️


1. 영화의 제목이 '미성년'인 이유


충격적인 설정이다. 아빠의 외도사실만 해도 충격인데, 외도상대의 딸이 학교 동기이고, 또 그 여자가 임신까지 했다니. 영화를 보는 내가 다 역겨움을 느꼈다. 하지만 충격적인 설정에 비해 영화는 비교적 '순한맛'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서로 쌍욕을 하며 뺨을 때린다거나, '김치싸대기'를 날린다거나 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영화가 '미성년'의 시각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리와 윤아의 관점에선 아무리 역겹고 미워도 아빠는 아빠, 엄마는 엄마다. 대원과 미희의 무책임함에 설령 연을 끊고 지낸다 해도 피로 맺어진 그 관계를 끊어낼 수 없다.



<미성년>은 대원과 미희의 불륜을 비난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그보다 충격적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열일곱 소녀들을 무대에 올린다. 96분이라는 길지 않은 러닝타임 가운데, 적지 않은 비중이 이들의 감정을 비추는 데 사용된다. 초반부, 속도감있는 전개를 통해 사건을 설명한 것도 관객이 주리와 윤아 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2. '미성년' 같은 어른들, '어른'같은 미성년들 

미성년, 말 그대로 아직 성년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법적으로 '판단능력이 불완전한 존재'로 간주되어 행위능력을 제한받는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미성년과 미성숙은 동의어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미성년>에는 전혀 '어른답지 않은' 세 사람이 등장한다. 대원과 미희, 박서방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책임감이 없다는 것이다. 성인하면 연상되는 자기통제능력, 책임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물들이다.


병원에서 딸을 보고 도망가는 모습이란 ㅋ....

대원은 외도를 순간적인 '실수' 취급한다. "술에 취해서"라는 변명을 하며 외도사실을 없던 일로 무마하려한다. 성욕인지 사랑인지 묻는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미희는 열일곱 딸보다 정신연령이 한참 낮아보인다. 정말 충격이었던 장면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데 출생증명서가 있어야 한대. 난 미성년자라서 안줘."


미희는 아이를 키울 형편이 안되는 상황에서 기어이 출산을 감행하고, 태어난 아기의 얼굴을 보지도 않는다. 아기가 곧 죽을 것을 알기에 보지 않았다고 나오지만, 이 또한 책임감이 없는 것이다. 미희의 딸 윤아는 아기를 '동생'이라고 애지중지하며 책임지려 애쓴다. 자신이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아기를 보지 않은 미희와는 사뭇 다른 태도다.


박서방은....정말 말할 것도 없다. 영화 중 잠깐 등장했을 뿐인데 "엄마, 여자로서 정말 불행하게 살았어"라는 미희의 말이 단번에 이해됐다. "너 스무살 넘었지? 카드 좀 만들래?" 라며 윤아에게 현금서비스 등을 시키려 하는 박서방의 태도는 나이를 먹었다고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새삼 실감하게 했다.



아빠! 내 이름은 알아 ? 우리 다신 보지 말자!


봉고차를 타고 도박을 하러가는 박서방에게 던지는 윤아의 한 마디. 딸이 몇 살인지도 모르는 아빠가 '아빠'라 불릴 자격이 있을까.


어른이란 이름의 무게를 살아내지 못하는, 무늬만 어른들. 이미 철이 들었는데도 미성년이란 이유로 편의점 손님에게 무시받았던 윤아가 참 안쓰러웠다.



3. 세상에서 가장 묘한 친구관계
너 때문에 우리집은 지옥이다!

주리는 윤아가 밉다. 미희를 뜯어말리지 못하는, "미친 년"이라며 자신에게 불쾌하게 구는 윤아가 싫다. 윤아도 주리가 싫다. "너네 엄마한테 전해. 우리 아빠 돈 그렇게 많이 없어"라며 미희를 '꽃뱀' 취급하는 주리가 밉다. 그래서 둘은 서로 경멸하고 이내 머리채를 잡고 싸운다. 강화유리가 깨질 만큼 격렬하게.


이들은 "다시 보진 말자" 는 말을 자주 했다. 싸우고 난 후에,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곧 다시 보게 된다.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다정하게 대한 적도 없지만, 충격적인 상황을 해결하고 이겨내는 데에 있어 '함께'라는 것은 위안이 됐다.




무책임한 대원과 미희를 대신해, 태어난 아기의 '아빠'와 '엄마'를 자처했다. 찾아오는 이 없는 동생의 면회를 갔고, 동생이 죽은 후에도 그 작은 존재의 마지막과 함께 했다. 친구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친구가 된, 참 묘한 관계다.

몇몇 관객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뜨악하셨던 것 같은데, 나는 나쁘지 않았다. 뼛가루를 우유에 타먹는 엉뚱한(?) 행위. 그렇게라도 동생을 기억하고 싶었던 모습으로 읽혔달까. 어쩌면 <이어즈&이어즈> 에서 비슷한 장면을 이미 본 탓에 면역이 돼서인지도 모르겠다.



4) 미성년이 웰메이드 영화인 이유

이 모든 것은 열일곱 아이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충격적인 일이다. 성인인 내게 일어났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 같다. 사실 주리가 바람나서 상대를 임신까지 하게 한 아빠를, 너무 '이성적'으로 대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라면 토할 것 같아서 쳐다도 보지 못했을 텐데.



그럼에도 이 영화는 감정적 소모 대신 '미성년'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물론 물건을 던지고, 고함이 오가고, 이혼소송을 하는 장면들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하인드 스토리로서 존재할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흔히 '불륜' '외도'하면 그려내는 자극적인 장면들 대신, 아이들의 상처와 성장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영화가 다소 불쾌한 주제에도 잘 만들어진 수작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영화는 그리 흥행하지 못했다. 관객 수는 29만명. 배우들이 모두 명연기를 펼쳤고 연출도 좋았지만, 소재의 불쾌함이 미흡한 성적을 내지 않았다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주제의식을 가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 특유의 MSG가 많이 빠진, <미성년>이었다.





영화 <미성년>

05.14. 왓챠플레이 관람

평점 : 8.5 / 10

한줄평: 사고는 어른이, 수습은 애들이 하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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