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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finder Oct 05. 2020

<나이트 크롤러> : '사고'는 '상품'일 수 있는가?

왜곡된 저널리즘과 자본주의가 낳은 소시오패스

광고주의 존재를 미처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 나는 방송사는 어떻게 돈을 버는지 궁금해했다. 참 순진했던 그 땐 방송사 뒤엔 대기업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물었다.


수신료는 얼마 안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시청률이 왜 중요한거지? 그 시각에 시청한 가정에게서 돈을 가져가는 건가? 


지금 나는 뉴스에 광고를 끼워 파는 건지, 광고에 뉴스를 끼워파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광고가 방송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광고주가 브랜드 광고에 효과적인 ‘시청률 높은’ 프로그램을 선호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방송사는 ‘기업’이 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뉴스도, 기업의 홍보 프로그램 격으로 전락한다.





축축한 밤, 사고현장을 헤집고 다니는 이가 있다. 사고소식을 들으면 차를 몰아 현장에 누구보다 먼저 도착하려는 이가 있다. 그는 나이트크롤러(night crawler)다.




루이스는 우연히 사고현장을 촬영해 방송국에 파는, ‘나이트크롤러’의 존재를 알게 된다. 도로의 맨홀 뚜껑을 훔쳐다 팔 정도로 돈벌이에 혈안이 올랐던 그는 나이트크롤러로부터 돈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곧장 카메라를 구비해 일을 나서게 된다.


** 나이트크롤러 : 사건이나 사고를 촬영해서 방송국에 파는 프리랜서 카메라맨 **





그는 장비가 썩 좋지도, 사건 현장에 누구보다 빨리 도착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총상을 입은 이에게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가 카메라를 들이댔다. 방송사의 입장에선 ‘상품가치’가 있는 촬영을 한 것이다.




그의 영상은 로스앤젤러스 지역방송 KWLA의 보도국장 니나로부터 호평을 듣는다. 그렇게 처음으로 돈을 벌고 자신감을 얻은 그는 나이트크롤러로 성공하기 위한 수를 두기 시작한다.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시신을 봐도 역겨움이나 공포 대신, 누구보다 빨리. 생생하게 촬영해 돈을 벌 생각밖에 없었다. 그에게 사건은 상품이다. 특종 앞에선 사람의 목숨도 ‘재화’가 된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촬영해야 한다.


우린 범죄를 좋아해요. 일례로 차량 탈취 사건은 뉴스도 아니죠.


루이스의 속물근성은 시청률을 향한 니나의 집착과 만나 광기가 된다. 저널리즘이 가진 의미는 퇴색돼 사라진 지 오래.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팀이 되어 ‘더 나은’ 뉴스를 만들기 위해 힘쓴다. 물론 그들에게 더 나은 뉴스란, 유혈이 낭자한 자극적인 뉴스를 의미한다. 그래야 시청자를 더 오래 붙잡아둘 수 있으니까.




구급요원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순간, 피 투성이의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루이스의 모습은 꽤나 섬뜩하다. 이 영화에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이다. 함께 일하던 파트너가 용의자의 총에 맞아 죽음을 앞둔 상항에서도, 눈 하나 깜짝않고 그를 촬영했다. 긍정적 의미에 기울어져있는 일관성의 의미가 퇴색되는 순간이다. 그는 좀 변해야 하는데.



생사를 오가는 장면의 촬영. 그것이 ‘국민의 알 권리’로 표장된다 하더라도 그 곳에서 그들을 살리려 애쓰는 구급요원들의 헌신 앞에선 위선으로 전락할 뿐이다. 결국 그들의 ‘셔터질’은 생명을 구하는 데 있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니까.


<나이트 크롤러>는 저널리즘 영화다. <더 포스트>와는 결이 다른, 언론의 어둠을 비추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필연적으로 언론의 그림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를 통해 같이 생각해봅직한 질문들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1. 언론은, 언론이기 전에 기업인가?




언론사에서 근무하며 그들의 생리를 알게 됐다. 결국 콘텐츠가 전달하는 가치 이상으로 조회수가 중요했다. 아무리 ‘가치있는’ 기사라도, ‘독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묻히기 일쑤였다. 안타깝게도 좋은 기사의 조건을 대중들이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독자수, 조회수. 방송사로 따지면 시청률 급의 성적표들은 광고주들을 끌어당기는 필수아이템이 됐다.



기업의 존재이유는 ‘이윤 창출’이다. 아무리 기업에게 윤리적 태도를 요구해도, 근본적인 그들의 존재 이유는 바뀌지 않는다. 언론도 건물에 직원을 고용해 굴러가는 하나의 회사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을 회사와 완전하게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을까? 삼성, 애플이 만듦새 좋은 스마트폰을 만들어 ‘많이 팔면’ 장땡이듯, 언론도 기사.콘텐츠를 ‘많이 팔면’ 그걸로 제 역할을 다 수행한 걸까?



언론도 먹고 살 길을 도모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말이 언론이 ‘공익보도’와 ‘국민의 알 권리 실현’이라는 사명을 모른 척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언론은 태생부터 부여받은 목적이 있다. 시대가 변했다 해도, 그들은 그 목적을 퇴색시키는 것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받은 적이 없다. 




비디오 프러덕션 뉴스, 루이스가 세운 자칭 ‘회사’는 철저히 자본주의적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누구보다 빨리 출동해 사건을 촬영하고, 최대한 비싼 가격에 판매한다. 무급인턴으로 채용된 이들은 정직원과 임금인상을 꿈꾸며 열정페이를 감내한다. 철저히 기업의 생리대로 움직인다.



애초에 루이스는 ‘저널리즘’을 꿈꾼 적 없다. 그는 그저 돈이 필요했고, 나이트크롤러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다고 확신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속물근성은 시청률을 향한 니나의 집착을 만나 광기로 변했다. 루이스 개인은 기자도 언론도 아니지만, 지역방송사와 ‘동업자’가 된 순간 루이스의 움직임은 저널리즘이 되었다. 엄밀히 말해, 썩어 문드러진 저널리즘.



2. 사건.사고는 '상품'이 될 수 있을까?


일전에 변상욱 앵커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신입 기자 시절, 사회부에서 일하며 뭐라도 ‘건져야’했던 그는, 병원과 경찰서를 오가며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나길 바랐더랬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기자스러운’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사건이 될 만한 거라면 누군가 죽어도 좋다는 생각. 보통의 이성적 사고로는 어림도 없는 생각이지만,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사건을 추격하는 순간 윤리적 사고를 잃기 쉽다.




루이스가 처음 촬영한 사건은 오전 6시 뉴스 자료화면에 나왔다. 자신의 촬영물이 뉴스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을 직접 지켜본다. 차량 탈취사건. 비교적 흔해서, 뉴스로서의 ‘가치’가 높지 않은 사건이다. 경제학적 논리와 함께라면 사고에 가치를 매기는 비윤리적인 일이 일어난다.



자주 발생해서, 사람들이 ‘무덤덤해’ 할 사건은 아침뉴스로, 흔치 않게 발생하는 흉악범죄는 저녁 메인 뉴스에 편성된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1면을 장식하는 것은 희소성 있는 사건이다. 특히 시청률이 중시되는 지역뉴스는 더욱 그러했을 터.


같은 맥락에서 묻는다. 교통사고를 보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력범죄 보도 목적이 시민의 안전제고라고 한다면, 교통사고 보도도 같은 맥락일까? 누군가의 사고가 보도분량을 채우기 위한 상품으로 이용되는 건 아닐까? 이건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나 자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3.  국민의 알 권리는 어디까지인가?


사실 ‘알 권리’는 어딘가 이상한 데가 있다. 재산권, 생명권, 이동의 자유의 권리 처럼 ‘본질적인’ 가치가 아님에도 꽤 중요하게 보장받고 있다는 것이다. 알 권리는 기본권에 준하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다. 생명권과 알 권리가 충돌한다면 당연히 생명권이 중시돼야 한다.


하지만 언론의 생리를 만난 ‘알 권리’는 천하제일의 권리로 승격된다.



강력범죄 피해자의 이름, 사는 곳을 알 권리가 국민에게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그 사건이 일어난 지역에 위험성을 알리는 정도가 공익성에 부합한다. 하지만 언론의 취재경쟁 속에 피해자들은 국민들에게 벌거벗겨 노출되기 일쑤다. 누군가의 원통한 피해사실은,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의 ‘가십거리’가 된다.



정치인들의 과거. 공약 등의 정보들을 국민들이 알아야 하는 이유는 주된 이유는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선택을 위한 정보가 아니라면, 국민의 알 권리가 제약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He’s dead. Get this shoot.” 


루이스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다. ‘그는 죽었으니 촬영하자’


용의자를 목격했음에도 경찰에 제보하지 않고 ‘더 큰 범죄’를 기다렸던 루이스. 그는 천성이 악한 사이코패스일까, 아니면 자본주의의 일그러진 산물일까.



명작으로 손 꼽히는 <스포트라이트> <더 포스트> 이 두 편의 영화는 ‘바람직한’ 언론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하지만 우리는 정답보다 오답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곤 한다. 어쩌면 언론인을 꿈꾸는 이들이 가장 먼저 봐야 할 영화는, 오답만을 골라 담아낸 교과서 <나이트크롤러>가 아닐까.



영화 <나이트크롤러>

20.04.03 왓챠 관람

한 줄 평: 왜곡된 저널리즘과 자본주의의 일그러진 산물. 누구보다 다르게 남들과는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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