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이외의 UX에 대하여
저는 TV를 백색소음으로 쓰는 편입니다.
집에 있으면 보지 않더라도 항상 틀어놓는데요,
너무 시끄러운 건 또 싫어서
주로 켜놓게 되는 것은 보통 영화채널입니다.
영화 채널들을 자주 보시는 분이라면 알겠지만,
자주 상영하는 영화들이 있거든요.
그때그때 제철 메뉴들이 바뀌더라도
늘상 나와있는 밑반찬처럼
잊을만하면 나오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아저씨, 타짜, 베테랑, 검사외전, 범죄도시,
요런 영화들이요. 익숙하시죠?
이제는 짤만 봐도 대사를 읊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대사 맞춰보실래요?
며칠 전에는 베테랑을 하더라고요.
벌써 몇 회 차 관람인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웬만한 주요 장면들 대사는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유독 귀에 자주 들어오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왜 귀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계속 비슷한 대사가 반복되다 보니 귀에 걸렸나 봅니다.
그냥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 아니냐구요?
그럼 조금 더 보시죠!
당신이나 나나, 서로 각자 일하는 거 터치 안 하기로 했지만,
내가 한마디만 한다.
우리 쪽팔리게 살지는 말자.
이쯤 하니까 두 장면이 떠오릅니다.
야아!!!!!
우리 막내한테 칼침 놓은 새끼들이 누구야!!!!!!
어디 경찰이 시덥잖치않게 이런 스애끼한테 당하고 다녀!!
팍쒸 주글라고,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수갑 차고 다니면서 가오 떨어지는 짓 하지 말자잉
원래 제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사는
아래 대사였습니다.
이 대사는 제 책 챕터 제목으로 인용하기도 했었고요.
저 영화를 처음 볼 당시에는 인지심리학에서
'프레임'을 정의하는 법에 한참 꽂혀있었거든요.
<베테랑>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쪽팔리게 살지 말자'라는 메시지를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알았습니다.
아마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말하는 장면들에서는
다른 단어로 대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쪽팔리게 살지 말자'보다,
'가오 떨어지는 짓 하지 말자'처럼요.
직접적인 대사로 표현했다면,
오히려 은연중에 남는 느낌은 덜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영화(드라마)는 메시지를 대놓고 전달하고,
어떤 영화들은 메시지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느낌이 남습니다.
그게 꼭 뭔가 교훈적인, CJ배급스러운, 가족영화 답지 않아도요.
(얘네들은 오히려 메시지가 명확한 편이죠)
예를 들어, <레옹>은 특별히 어떤 주장을
뚜렷하게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강렬한 느낌을 남기지요.
아련하고 쌉쌀한 감정 같은 것들이요.
저는 그런 느낌들의 덩어리가 UX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화면의 미적인 아름다움(미장센)이나,
사운드, 공간감 같은 감각적인 정보들뿐만이 아니구요.
그 작품이 결국 '어떤 느낌을 남기는가'가 핵심이라고 봐요.
그리고 이건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도 생각합니다.
UX라고 하면 그 단어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화면 설계를 떠올립니다.
해당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UX는 (시각적인) 디자인의 영역에 가깝지요.
오히려 디자이너들은 UX를 시각 디자인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을 '문제해결'로 정의합니다.
디자이너의 올바른 번역은 '설계자'에 가깝다는 취지로요.
실제로 이제는 디자이너가 기획을 하는 시대이기도 하고요.
스스로를 기획자로 정의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심리학을 베이스로 하는 기획자 입장에서 보는 UX는
'느낌을 전달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드라마 등의 콘텐츠가 됐든, 공간이든,
음식(식사경험)이든, 분야를 막론하고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트리거>라는 드라마를 봤습니다.
중반부터 전개에 아쉬운 점들이 있었지만,
UX적으로는 꽤 괜찮은 드라마였습니다.
거기에는 소재의 힘이 컸고요.
사람들로 하여금, 총기가 허용된 한국사회를 상상하게 했거든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유가
도덕성에서 무력으로 넘어가버린 사회,
안전을 위해 시민의식이 아닌
살상력을 갖춰야 하는 사회에 대한 상상이요.
누군가는 지금이 낫다고 생각했을 테고,
누군가는 그런 사회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느 쪽이든, 총기가 만연한 한국이 된다면
'과연 나는 총기를 원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이런 논의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면,
자연스럽게 현재 사회의 문제와 해결방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지요.
실제로 저도 드라마를 본 주변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총기 보유로 시작해서, 이상적인 사회질서에 대해서까지요.
개봉 당시 여러 반향을 일으켰던 영화 <조커>입니다.
저는 재미있게 봤어요.
특히 소름 돋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지하철에서 흠씬 두들겨 맞던 주인공이,
결국 품고 있던 총으로 양아치들을 살해하는 장면입니다.
관객들로 하여금, '살인'이라는 행위에 '쾌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장면이라고 느꼈습니다.
솔직히 저도 속 시원한 느낌을 받았고요.
보신 분들이라면 기억하실 겁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감정을 겪을지, 치밀하게 설계된 장면 같았습니다.
화면의 시각적인 아름다움, 스토리의 개연성, 캐릭터의 현실감도 중요하겠지만,
결국 그것들이 모두 합쳐져서 소비자에게 어떤 경험을 하게 만드는가.
사실 그런 게 UX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글의 부제가 '디자인 이외의 UX'였습니다.
이 글의 제목은 이 책을 오마주 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이 좋아요 저는.
자신의 틀로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유현준 교수님도 있고요, 궤도님도 있고요.
앞으로 이런 글을 좀 더 써보려고요.
심리학자 입장에서 보는 UX.
문과의 궤도님이 되어 심리무새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