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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아빠 Nov 14. 2023

집에 가자

2023. 11. 9.


“집에 가자”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 입원실 면회, 특히 중환자실 면회는 극도로 통제되고 있었음에도 나, 그리고 제주도에 근무 중이던 형까지 모두 모인 모습에 아버지는 직감하셨을 것이다. 

‘무슨 일이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어머니는 그저 쓴 웃음을 띤 채 입을 다무셨고, 결국 나는 ‘병원에서 모든 의료적 방법을 다 썼고, 더 이상 조치할 것이 없데요’ 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의 아버지 말씀이 바로,     


“집에 가자” 였다.     


산소 포화도 측정기는 70% 언저리를 넘나드는 상황에 – 나중에 알아보니 90% 만 되어도 자가 호흡이 힘들어지고 신체 손상이 시작된다고 한다 – 내가 지금껏 보고 들어온 것 중 가장 힘겹고도 거친 호흡 소리는 지금 당장 ‘정지’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인데도 아버지의 뜻은 완강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이후의 모든 의료적 책임, 권리를 포기하고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남인 형이 앰뷸런스에 선탑하여 아버지와 출발한 후, 나는 나머지 식구를 차에 태워 뒤를 따랐다.      


그리고,

한 시간 쯤 달렸을까, 예정된 소식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편안한 내 집에서 가족들에 둘러싸여 평안히 가고 싶은 소박한 바램도 이루지 못한 채 좁은 앰뷸런스 속에서 말이다.     


어머니의 통곡, 

함께 우는 아내,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전화벨,

그 틈에서 낯 선 슬픔에 어색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들까지.

좁은 차 안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못해 터져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아직 집까지 3시간도 더 남았고, 나는 핸들을 잡고 있는데 말이다. 

     

하는 수 없다.

삐져나오는 눈물 한 방울을 얼른 휴지로 찍어 누르고

나는 기계가 되기로 했다. 


‘나는 운전 기계다’

‘안전하게 집까지(장례식장까지) 손님을 모시는 것이 목표이다.’

‘손님들에게 무슨 슬픈 일이 생겼나 보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다. 나는 그저 운전만 할 뿐이니까.’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이퀼리브리엄’의 크리스천 베일처럼 감정이란 이성과 논리를 방해하는 무용지물의 것으로 치부하며 오직 냉철한 판단을 통해 주어진 임무 달성에만 올인하는 기계적 행동만이 당시의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어쩔 수 있겠나.

갓길에 차를 멈추고 통곡을 하겠나.

앰뷸런스를 쫒아가 아버지를 잡고 흔들면서 영화에서 나올 법한 대사들을 읊어대겠나.     


전용 차로를 타고 한참이나 앞서가는 앰뷸런스보다 늦지 않게 따라가야 할 것이고,

친지분들께서 장례식장을 잡아주고 계시지만 상주로서 얼른 가서 장례의 제반 절차를 준비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이 낯선 슬픔, 그리고 그보다 복잡하고 긴 절차가 남아있는 시점에서 감정이란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로서는.     


그리고,

이후 과정은 보통의, 남들이 겪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던 듯 싶다. 

슬퍼했고, 피곤했고, 그 와중에 수육은 너무 맛있었고...


1년이 흘렀다.

아버지가 가신 날이 11월 11일이어서 그런지 편의점 매대에 진열된 빼빼로를 보니 작년 그 날이 떠오른다.      

기억 속의 나는 마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작은 우주선, 혹은 타임머신 운전석에 타고 있는 듯하다. 앞에 보이는 것은 캄캄한 우주의 풍경이고, 마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듯 끝없이 질주할 뿐이다. 


문득 걱정이 앞선다. 

기일을 맞아 내일 고향에 내려가야 하는데.

돌아가신 이후로도 여러 번 갔던 길이지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전화벨이 울린다. 

아내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밝게 받는다.      


그리고는,

부끄럽게도 울음이 터져 나온다.      

아, 이것 참...


지난주에 집에서 울컥했을 땐, 얼른 옆방에 가서 정리했고,

엊그제 카페에서는 화장실에서 추스렸는데,

이렇게 갑자기 나오는 건 뭐냐. 눈물 루(淚)자를 써서 ‘루실금’인가.     


“아빠 생각나는구나”

“응”

“그 때 차 안에서 나만 많이 울어서 미안해”     


어허... 18년 살았더니 말 안 해도 척이구만.     


감정 억제니 방어기제니 부조화니 이런 것들 다 집어치우고,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어쨌거나 아버지는 고향 집보다 훨씬 좋은 진짜 집에 가셨고, 

나는 못 울었던 것 지금 울었고, 

말 안 해도 아내는 다 이해해주니 다 잘된 것 아니겠나.


집에나 잘 다녀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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