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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아빠 Mar 15. 2024

문자에 속박당한 감각의 부활을 위해

'듣는 것'의 치유⋅예방적 가능성

경제성, 편리성은 일견 단순화를 지향하는 측면이 있다.


첨단기술의 발명은 인류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그 편리함이란 생활과 업무에 있어 얼마나 단순화를 더 실현하느냐가 관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문자의 발전 과정 또한 단순화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문자는 국가, 지역, 등 문화 공동체가 합의하여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인만큼,

문자가 발명된 이후 고도로 발전해 나가면서

말하고, 듣고, 이해하는데(즉, 의사소통에) 필요한 사고의 노력, 시간, 집중력을 효과적으로 감소시켜왔다.

 

일상생활의 대화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한 후 이해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거의 실시간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생각의 필요성은 줄어든 것이다. 

거기에는 상호 합의된 기호, 약어, 표현의 단순화 등을 내포한다.


실지로 일상에서 표현되는 말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복잡 미묘한 감정은 고작 몇 가지 단어로 대체되고 있다. 

'맛있다' 라는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게 몇개나 될지 생각해 보라. 

일상에서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TV와 SNS에서.

'존맛', '미쳤다' 그리고 떠오르는 것이 있는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고작해야 1000개 정도라고 한다. 

이는 외국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하나의 단어가 하나의 의미를 가지기 보다는 여러 의미를 가지는 다의어가 많다지만, 우리가 표현하고 이해하는 세계는 우리의 문자만큼이나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도하게 축소되고, 단순화되고, 약어, 기호화되고 있는 현 세태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문자가 우리의 사고, 상상력은 물론이요,

우리의 세상을 단순화, 축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언어의 발달과 궤를 함께한다.

('문'이 글월 문 文 이지 않는가)


언어가 규격화, 제도화 되면서 각종 규격, 규범들이 정형화되었고, 

그 정해진 약속들  가운데에서  (자연, 자연스러움에 반하는) 기술이 발전되어왔다. 


그 약속과 규격, 형식들의 저변에 깔린 구조주의는 언어학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문자와 기술의 발전은 상호간에 땔래야 땔 수 없는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있다. 

각종 가전제품이 우리의 가사노동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장작을 패지 않아도 되고, 냇가에서 물을 길어오지 않아도 된다. 빨래를 널 필요도 없고 설겆이도 알아해 해준다. 


노동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생각까지도 기술이 대신 해주는 시대가 되었다.

날씨를 알아보기 위해 하늘을 보지 않는다.

내 손안의 작고 네모난 그 요물이 가진 능력으로 인해, 우리의 삶에서 고민이 차지할 공간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문자에 의존하지 않았던, 먼 조상의 구어(orality) 세계는 현 시점에서 보면 미개해 보일지 몰라도,

오늘날의 우리가 더이상 알 수 없는 감정적, 직관적 깊이를 지녔을 것이라고 한다.

맥루한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강렬한 감각적 몰입력을 가졌을 것이라 말했다.

(Marshall McLuhan,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s of man...)112-113.


소설 "내 영혼의 따뜻했던 날들"에서 인디언 할아버지가 나무와 대화하는 모습이 허구였을리 없다고 믿는다.

조금 더 쉽고 가까운 예를 들자면 우리 할머니가 "오늘 누가 오겠네, 날씨가 어떻겠네"라며 아무 연락도 없던 지인의 방문과 날씨를 예견한 것이 운이였겠는가!


그렇다면 문자의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감정과, 직관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한 번 문자의 세계에 편입된 이후로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라캉은 말했다.

차선책으로 문자에서 거리를 둘 수 있는 방법은 문자를 '보는'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한 단어, 한 문장에 집중하기 보다는 이야기 전체를 조망하는 행위이다. 

문자 자체보다는 스토리를 조망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다. 

눈으로 현장을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는 것이다.

상상력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과정이다. 

생각을 안 할 수 없는 시간이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며 자주 경험한 것은 

읽는 나 자신이 종종 책의 내용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밤이 깊고 졸리다 보니, 글자 자체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기 쉽다. 

간혹 '내가 어디 읽고 있었지'라며 글에서 길을 잃은 적도 있었다.


그에 비해 듣는 아이는 전혀 그런 적이 없었다.

읽는 중간에 '아빠, 뭐라고요? 다시 읽어줘요'라고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책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음에도 아이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책의 내용을 또렸이 이야기하곤했다.

'이상하다, 읽은 건 나인데 왜 들은 아이가 더 명확히 기억하고 있을까?' 라고 생각한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아마도, 내가 주목하는 것은 문자 자체였지만, 

아마 아이는 문자가 표현하고자 했던, 하지만 온전히 표현할 수 없었던 세계를

포괄적으로 상상하고,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포괄적인 이해와 상상력을 통한 감각의 생성은 문자 너머에서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성경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신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한다.


적어도, 기독교의 관점에서 인간은 언어의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 언어는 문자, 즉 글이라기보다는 '말'(orality)였다. 

근대 이전까지의 성경이란 '읽는' 책이 아닌 '듣는' 책 이었다는 역사만 보더라도 언어의 본체는 '말'이다.


문자의 발명은 문명화를 촉발했고, 기술의 발달은 날로 가속화 되지만, 

인간의 사고, 상상력, 감각은 날로 무뎌져가기만 하는 현실을 어찌 극복해야 하나.


'듣는 것'은 좋은 회복의 방법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이왕이면 좋은 글을 들어야 할 것이다.


치료보다는 예방의 효과가 뛰어나듯,

가급적이면 문자, 첨단기술에 익숙해지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듣는 것'을 통해 감각의 깊이,  상상력을 확장해 놓는다면

첨단의 세상을 좀 더 풍부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오늘 밤 아이에게 좋은 글 하나 읽어주는 것은 어떨까?


<참고>

Walter J.Ong orality and literacy. New York. Rutledge, 2002.

Nicholas Carr.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 청림출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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