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이 싫은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기호를 밝히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다. 세대를 막론하고 만연한 가치이기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먹고 싶은 점심 메뉴를 말하기 전 상사의 눈치를 보는 것과 학교에서 좋아하는 연예인을 말하기 전 친구들의 여론은 살피는 것. 장소만 바뀌었을 뿐 우리는 어디서든 눈치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고, 그래야만 사회성이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소속된 집단이 그럴만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범위의 의견과 행동을 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범위는 아주 협소하며 이미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눈에 띄어봐서 다른 사람의 시선이 무섭지 않을 것 같았는데 뭐 하나 시작 채비가 갖춰지면 신경 쓰이는 게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이 싫어서’라니..
책 속의 한 구절도 아니고 자그마치 제목이다.
제목부터 패기 넘치는 이 책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얼마 전 이전한 땡스북스에서 책을 집어 들어 목차를 보았을 때 자연스레 네 번째 장을 펼쳐보게 되었다.
‘신분 차이’
평소 우리나라 경제의 미래는 잘못되면 일본이고 잘 되면 영국같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부에 의한 계층 분화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위치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신분이 생길 거라고.
4장은 주인공 계나가 남자친구인 지명의 가족을 만나는 장면이다. 동시에 현재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와서 만난 남자친구 인도네시아인 리키와의 대화가 번갈아 가며 나온다. 강남에 사는 대학교수 아들 지명의 가족이 강북 재개발 지역에 사는 계나를 무시하는 장면과 인도네시아인 리키가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인종적 우월성을 비판하는 장면이 겹치면서, 우리의 겉치레적 인류애를 위선으로 규정시켜 준다. 자, 반성문을 써보자.
P.85
“한국 애들은 제일 위에 호주인과 서양인이 있고, 그다음에 일본인과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지. 그 아래는 중국인, 그리고 더 아래 남아시아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데 사실 호주인과 서양인 아래 계급은 그냥 동양인이야. 여기 사람들은 구별도 못해. 걔들 눈에는 그냥 영어 잘하는 아시안과 영어 못하는 아시안이 있을 뿐이야.”
p.86
“너도 보면 알 거야, 사실 남아시아에서 온 애들이 더 잘 살아. 태국이나 베트남에서 온 애들은 그 나라에서는 잘사는 애들이거든. 반면에 일본에서 온 애들, 한국에서 온 애들은 다 가난한 집 출신이잖아. 너희 나라에서 좀 사는 집 애들은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지.”
이렇게 말하는 리키의 아버지는 자카르타에서 호텔을 두 개나 운영하는 부자.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다.
지금도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흑인들,
그리고 그들이 무시하는 아시안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저항의 주체조차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끝없이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업무에 필요한 능력은 입사지원서에 없다. 업무와는 상관없이 비교우위를 따지기 위한 새로운 항목들이 늘어났을 뿐. 벗어나고 싶은 사회는 혐오를 키웠다. 그래, 한국이 싫어졌다.
그렇게 유행처럼 워킹홀리데이는 번져나갔다.
내가 아는 형 누나 친구들은 곧 잘 호주로 떠나곤 했고, 그들 중 대부분은 할 수만 있다면 그곳에 계속 머물며 영주권 나아가서 시민권 얻기를 원했다. 어쩌다 한국에 돌아올 때면 그 땅에 대한 동경을 스스럼없이 내비치곤 했다. 멜버른이니 브리즈번이니 농장 일은 어떻고 한인사회는 어떻고, 월급이 아닌 주급을 주는 장점은 이렇고 하는 얘기들..
당시 알던 주변 사람 중 6명이 호주에서 살고 있다.
그땐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10년째 창문 없는 방에 살고 있었던 그때,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한 준비로만 수년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고 있었기에, 내 미래는 창문 없는 방만큼이나 어두웠다. 군인 출신에 경상도 분인 아버지께서는 공무원을 권유하셨고, 학점이 나쁘지 않았던 터라 교내 고시원에 들어가서 흥미라곤 1도 없는 공무원 공부를 한 적도 있다. 다섯 식구가 사는 작은 집에 가끔 붙는 차압 딱지까지. 희망이 없다고 결론짓기에 참 좋은 환경이었다.
계나가 호주로 떠났듯 나는 대구를 벗어나 서울로 떠났다.
작가는 현실에 대해 꾸밈없이 이야기를 전개한다.
주인공 계나는 생리 중이어서 속옷을 갈아입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결국 호주까지 가게 된다. 불편함을 꾹 참고 참는 긴 시간은 마치 그동안 한국에서 겪었던 부조리한 상황들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참고 참고 또 참는.. 한국을 벗어나는 것부터가 싸움인 것이다. 온전히 나로 살기 위한 싸움.
계나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얻어내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책을 읽어보시길.
시대마다 통용되는 시대사조가 있다. 그래서 각 세대에 공감되는 내용과 전개가 있다. 앞선 세대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세대의 시대사조는 “개인의 행복”이다. 국가는 발전했고 삼성 엘지는 위대한 기업인데, 그래서 당신은 행복하냐는 말이다.
p.171
나도 알아. 호주가 무슨 천사들이 모여 사는 나라는 아니야. 전에 한 번은 트레인에서 어떤 부랑자가 나한테 오더니 “너희 나라로 돌아가.”하고 소리를 지르더라. 시민권 취득 시험이라고, 없던 시험까지 생겼어. 문제도 꽤 어려워. 크리켓 선수 이름 같은 게 막 문제로 나와.
그런데 내가 그 시험공부하다가 그래도 호주가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한 게 있었지.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하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는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가사가 비교도 안돼.
88만원 빠링허우 사토리
한중일의 현재 젊은이들을 대표하는 명칭들이다.
중한일 순으로 다음의 단계를 거치게 될 것이다.
곧 우리는 ‘해탈’한 ‘사토리’들이 되겠지.
빠링허우들은 해를 거듭하며 낮아지는 경제성장률을 겪다가 다음 세대들이 88만원의 벽에 부딪히는 걸 볼 테고.
결론은 없다.(정도가 없다는 의미다.)
늘 해오던 잘못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 같다.
남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 집단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 이와 같은 어리석음만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 삶의 주체이지만 우리가 얻는 정보의 대부분은 객체(관찰자)로서의 정보이다.
그래서 너무 쉬이 주체로서의 관점을 상실하곤 한다. 의지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이미 주어진 주체의 자격을 잊은 채로 그 지위와 권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그대는 부디 그 왕위를 회복하시길 바라본다.
책은 한국에 대한 혐오 대신 삶을 돌아보고 정리할 기회를 주었다. 책 속에 나온 한국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여러 상황들은 이미 인지하고 있던 부분이라,
새로운 혐오를 키우거나, 감정을 격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호주에 가고 싶지 않아 졌다.(평소 갈 생각도 없었지만)
그리고 장강명 작가의 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