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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Dec 10. 2021

고장난 이어폰과 열등재 인간


고장난 이어폰과 열등재



툭 ㅡ 끊기고 말았다. 이번에도 예고 없이 한쪽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전조 현상이 있었지만 내가 눈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천원짜리 이어폰의 운명은 짧으면 며칠 길면 몇 달이었다. 그 법칙이 벗어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내 인생에 예외적인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5000원 이어폰에게도 예외적인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네 운명이 내 운명이다.      



유선이어폰이 운명을 달리할 때마다 나의 선택지는 다이소 혹은 동네 문방구였다. 간혹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는 편의점을 선택하곤 했다. 대개의 경우 다이소였고, 이번에도 다이소를 가야하나 생각했다. 근데 갑자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순간적인 분노와 좌절 그리고 우울감이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밀려오는 감정에 당해낼 수 없었고 충동적으로 무선이어폰을 구매했다. 아무리 술에 취한 사람도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는다고 하던가. 그와중에도 에어팟이나 버즈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나는 후기가 꽤 많았고 가격이 합리적인 보급형을 구매했다.     


고장난 이어폰과 열등재


그러니까 내 인생이 한쪽만 고장난 유선이어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선이어폰은 예쁘지도 않고 기능적으로 우수하지도 않다. 아직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시장점유율은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처음 무선이어폰이 출시되었을 때 높은 가격으로 인해 사람들은 망설였다. 특정 브랜드 유저만을 위한 제품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바로 신문물에 호기심을 가졌고 신문물은 기대 이상의 효능을 보여줬다. 기기 외적으로 보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기기 자체적으로 다각적인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선이 꼬이지도 않고 AS 처리의 우수함까지 갖추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무선이어폰은 세련된 현대인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줬다. 다수의 유선이어폰 사용자들이 무선이어폰 사용자들을 힐끔 쳐다보고 관심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지금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유선이어폰 사용자가 오히려 시선을 끈다. 보급형에 합리적가격의 무선이어폰이 대량으로 공급되고 있다. 더이상 무선이어폰은 사치품이나 특정 유저만을 위한 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뿐 아니라 중장년층들도 무선이어폰을 사용한다.      

고장난 이어폰과 열등재


기능성도 떨어지고 시도 때도 없이 고장나고 AS도 불분명한 저가 이어폰을 오랫동안 사용했다. 사용했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어김없이 한쪽만 고장난 이어폰을 보면서 문득 이게 나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쪽만 고장난 이어폰이라 기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하지만 선을 꽉 잡아보면 어느 순간 양쪽이 다 들릴 때가 있다. 그렇게라도 수명을 연장시킨 이어폰으로 며칠을 버텨본다.


착각이었다. 이미 망가진, 싸구려로 시작된 이어폰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어쩌면이라는 희망으로 그리고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이유로 한쪽만 들리는 이어폰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며칠 후 다시 또다른 싸구려 이어폰을 만나게 된다.     


고장난 이어폰과 열등재


열등재. 소득이 증가됨에 따라 사람들이 소비가 줄어드는 소비재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소비가 증가할수록 열등재를 소비하는 비율을 줄인다. 반대로 말하자면 소득이 없는 누군가에게는 라면, 다이소 이어폰, 마트 마감 식자재 같은 열등재는 어쩔 수 없는 옵션이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상, 현실, 그래도 살기위해서 말이다.


충동적으로 구매한 보급형 무선이어폰은 편리하다. 제한된 예산에서 늘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이어폰인데 드디어 무선 이어폰을 구입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내 인생은 한쪽만 고장난 유선이어폰같다. 시장에서 퇴출될 위기에 놓여있고, 언제 사장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덜떨어진 이어폰... 그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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