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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Oct 19. 2019

느긋하게 쉬엄쉬엄

폰테 드알비아(Ponte D'arbia)

     오늘은 피렌체까지 올라가 차를 반납해야 하는 날이다.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시에나(Siena)에 들러도 되겠다 싶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어젯밤 산길 운전의 피로가 남아 있다. 점심 식당도 예약해 두었는데 무리한 일정으로 시에나를 주마간산으로 보고 나서 아쉬워하는 것보다는 여유롭게 토스카나의 풍광을 좀 더 즐기고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시에나 대성당과 시에나파의 회화를 잘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조금 더 키울 시간을 갖고 다음에 갈 수 있는 기회는 언제든 생긴다고 마음을 편히 가져본다.

     어제 먹은 아침 식사는 정말 대충 먹었는데도 약간 배탈의 기운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아침은 지나가는 마을에서 간단히 먹기로 했다. 농가 민박의 아침 식사는 (주인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무엇이든 소화시킬 수 있는 튼튼한 농부와 매일 아침 조깅을 하러 나가던 씩씩한 다리를 가진 외국인에게 적합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유를 넣은 커피나, 버터가 든 빵이 ‘상하다’의 단계까지 이르지 않아도 그쪽으로 방향을 조금 틀기 시작하는 것만 먹어도 뭔가 신호가 오기 때문에 미리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포지타노에서 사 온 달콤하고 새콤한 레몬사탕을 먹으며 토스카나 평원을 달린다. 카페인 대신 레몬의 새콤함을 투여하고 창문을 열어 맑고 시원한 공기를 맞으니 쉽게 사라지지 않는 미련 많은 아침잠 기운도 금세 사라진다. 5월이 토스카나의 진짜 매력을 느끼기에 완벽하다고 깨닫게 되는 풍경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진한 녹색의 밀밭이 바람을 따라 일렁이면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것처럼 밀밭에도 흰빛이 물결처럼 흐른다.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녹색을 푸르다고 하는 이유를 실감하게 된다. ‘우와!’하고 탄성이 터져 나올 만큼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하다가 사이프러스 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모습은 동화책 삽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아서 왠지 모를 익숙함에 안정감이 든다.

더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으로 스치듯 볼 수 없다는 마음이 차올라 차량이 드문 곳 갓길에 차를 세운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을 눈에 가득 채우고 마음속에 꼼꼼히 기억한다.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빙글빙글 돌며 사진을 찍어도 모두가 완벽한 한 폭의 그림 같다. 녹색 들판에 드문드문 핀 개양귀비와 이름 모를 들꽃들이 녹색 스카프에 찍어 놓은 화려한 포인트 컬러 같다. 먼 곳의 들판은 노랗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며 ‘유채꽃일까?’ 생각해본다.


     피렌체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달리다 지나게 되는 마을에서 아침을 먹을 생각으로 큰 도로가 마을 중심가를 지나갈 때면 [Bar]라는 표지판이 있는지 서행하며 살폈다. 휴식공간도 있고 동네 주민들이 앉아 커피를 마시는 곳을 발견하고는 차를 세웠다. 구글 지도를 보니 ‘폰테 드알비아 (Ponte D’arbia)’라는 마을이다. 바에 들어가서 커피와 피칸 파이를 주문하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사이클을 타고 와서 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와 신문과 커피, 피칸 파이를 계산하신다. 벌써 동이 난 피칸 파이를 보며 ‘호옷, 이 동네의 인기 아침메뉴 인가 봐’ 하며 살짝 기분이 좋아진다. 여행을 다니면서 작은 돌발상황에 많이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법과 남들이 보면 코웃음 칠 별거 아닌 작은 일에 행복해하는 일이 저절로 늘게 된다.


 이름 한번 들어보지 못한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아침을 먹으니 왠지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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