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과의 연락이 이렇게 드라마틱할 일인가 싶고
에디터는 업무의 분량에 글 쓰는 활동이 압도적으로 많을 뿐, 글쟁이가 아니다. 글을 쓰고 교정하는 것 외에도 다른, 수많은 '무언가'들을 한다. (*이 '무언가'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 또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섭외'. 낯선 단어는 아니다. 아마추어/프리랜서 에디터로 활동하던 시절 인터뷰를 한답시고 여러 취재원에게 섭외 메일을 돌려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말이 좋아 '섭외'지, 말만 바꾸면 업체 컨택, 제휴 문의 등 사무직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업무이니까.
다만 그 대상이 브랜드 담당자일 때와 일반 개인일 때의 차이가 있다면, 후자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커뮤니케이션에 감정이 섞이게 된다는 점이다. 특히나 출연 요청이나 필자 섭외를 목적으로 외부 인사들과 연락하다 보면 시작은 건조했으나 끝은 찝찝한(?) 이상한 상황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모 기업의 브랜드 채널에 올라갈 칼럼을 기고해줄 필자를 섭외해야 했던 이번 케이스가 그랬다. 10명의 리스트 중 한 달 가까이 지속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5명을 최종 섭외했는데, 뿌듯함은 그렇다 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재처럼 쌓였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보니 이게 꼭 철없는 연애가 끝났을 때의 기분과 비슷한 거다.
일과 연애의 공통점을 떠올린 게 처음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번에 느낀 이 께적지근한 감정은 유독 그 정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섭외 작업의 처음과 끝을 '나쁜 연애' 공식에 대입해 보았다.
기업 이름이 직접 노출되는 채널에 올라가는 글을 써야 하는 만큼, 섭외 대상 리스트를 뽑는 기준은 다소간 정해져 있다. 1) 글을 정말 잘 쓰거나, 2) 관련 분야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 사실 이것도 상황 따라 참 모호할 수 있는 선이지만, 어쨌거나 여기에 따라 레퍼런스를 찾다 보면 상사에게 컨펌받을만한 인재풀이 형성된다. 누굴 추천하든 딱히 안될 이유가 없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로 1차 리스트가 꾸려지는 것이다.
그다음은 최종적으로 '누구'를 상사에게 추천할 것인지 추리는 작업. 어쩔 수 없이 취향의 문제다. 타 매체에 기고했던 글과 각종 인터뷰 기사를 통해 필자의 히스토리를 파악하다 보면 희한하게 마음이 더 끌리는 쪽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 회사는 아니지만) 이 사람을 밀어주고 싶어.' 이런 생각을 하며 두어 시간 이상 특정한 사람의 글을 덕질하고 있는 나를 인지한 순간 머쓱해진다. 마치 고백도 하기 전에 상대와의 결혼까지 상상해보는 짝사랑 전문가가 된 기분이랄까.
우여곡절 끝에 최종 리스트를 컨펌받고 이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섭외 메일을 쓸 차례. "안녕하세요, 어디 소속 누군데요. 저는 스팸이 아닙니다."를 없어 보이지 않게 사. 바. 사로 부풀려 써야 한다.
기본적인 비즈니스 메일의 골격을 갖추고 나면, 구간마다 적절히 센스 있게 내가 파악한 상대방의 관심사나 이력을 언급한다.(나는 이것을 '양념 친다'라고 표현한다.) 너무 과한가 싶어 문장을 덜었다가 아, 이건 또 너무 딱딱한가 싶어 도로 넣기를 여러 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현타가 온다. 지금 내가 보내려는 메일은 본질적으로 10명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위해 100명에게 뿌리는 전단지와 같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래, 난 안될 거야, 아마'하는 심정으로 누르는 전송 버튼. 일은 저질러졌고, 이제 회신 여부는 오롯이 상대방의 마음에 달렸다.
까맣게 속이 타들어갈 때쯤, 회신이 왔다. 연애로 치면 '저기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하는 빤한 작업 멘트에 감사하게도 잡혀준 상황. 인사를 받아줬으니 이제 다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당신이 필요한 이유(섭외 취지), 구체적으로 마음에 든 점(좋았던 레퍼런스)을 어필해본다. 길 가는 사람 붙잡고 작업 거는 일이 으레 그렇듯이, 답장은 최대한 간결하게.(말이 길면 없어 보인다.)
사람 따라 메일로 보낸 고백을 전화로 응답해오는 경우가 있다. '한가하게 너랑 키보드 두들기고 있기에는 내가 충분히 바쁘다'는 뜻이므로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깔린, 정중한 목소리로 같은 레퍼토리를 읊는다.(그리고 나는 대체로 당황하지 않는 데 실패한다.) 상황이 좋다면 세부 조건(출연료나 고료 등)까지 슬쩍 얹어본다. YES가 돌아온다면, 데이트 신청을 예고하며 일보 후퇴한다. 너무 직진하면 재미없으니까(가 아니라 큰일 난다. 일이 잘되고 있을수록 중간보고, 중간보고를 잊지 말자.)
"회신 감사합니다. 말씀 주신 내용 내부 협의 후 정식으로 섭외 요청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보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
10통의 러브콜에서 5통의 'YES'를 받았고, 상부의 결재를 기다리는 동안 대체로 분위기 좋은 나날이 이어진다. 5명 모두 내가 그들 각자를 특정해서 연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황. 위에서 이들 중 누구에게 Stop을 지시할지 모르므로 나는 언제든 퇴로를 준비하며 커뮤니케이션(밀당) 해야 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꼬셔서 넘어와줬더니, 방지턱처럼 말마다 덜컥 덜컥 걸리는 대화가 이어진다.
???: 아, 에디터님, 제가 이번 원고 주제는 0000으로 생각해봤는데 이런 것도 되나요?
나: 아~네^^ 필자님의 분야가 잘 녹아나는 주제면 됩니다!
???: 아, 이런 것도 되는구나.. 그럼 첫 원고 마감일은 언제로 하면 될까요?
나: 아~지금 저희가 전체적인 스케줄 조정 중이라서요^^ 일정 픽스되면 주제 관련해서 다시 논의드려도 될까요?
이런 식의 핑퐁이 몇 번 반복되다 보면 대강 상대방도 상황의 컨디션을 파악한다. 조금씩 돌아오는 메일에 미묘한 감정이 읽히기 시작하고('너, 나 말고 또 있지?'), 대화에 피로가 쌓인다. 능청스럽게 연락을 유보하며 양다리, 삼다리, 사다리를 거듭하는 부도덕한 연인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같은 날 같은 마음으로 고백했는데 상대에 따라 너무나도 달라지는 엔딩. 쓸 수 있는 예산이 정해져 있으니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는 관계 역시 정해져 있다. 웃으며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를 선언하고 뒤돌아서는 '미안, 만나보니 안될 것 같아'를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내 마음이 식어 헤어지는 연애일수록 괜히 더 상대에게 나쁜 사람으로 남기 싫어지는 것처럼, 다 된 일을 무르는 메일을 쓸 때는 어쩔 수 없이 말이 길어진다. '찔러본 게 아니야', '나도 잘해보려고 했어', '그런데 엄마가(광고주가) 안된대....'를 오해 사지 않게 풀어내는 그 지난한 과정이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이별 통보를 하고 나면 오늘 내가 휴대전화에, 모니터에 대고 고개를 몇 번 숙였던가 세보게 된다. 아. 나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 예의 바르지 않았어...
써놓고 보니 이게 연애라면 이렇게 나쁜 애인이 또 있을까 싶다. 시키는 일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지만 나쁜 X가 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프리랜서로 일을 할 때만 하더라도 에디터란 그저 즐겁게(그리고 고통스럽게) 기획하고, 원고 쓰고, 남이 쓴 글 고쳐주는 '글밥' 먹고사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대행사 회사원이 된 후로 그것이 얼마나 납작한 환상이었는지 배우고 있다. 크리에이티브의 이면에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던 다양한 차원의 업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