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어쩔 수가 없다.
이번 박찬욱 영화의 제목은 다소 직설적으로 느껴진다. 영어로는 No other choice.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의 '어쩔 수가 없다'는 대사는 영화에서 여러 인물들에 의해 반복된다. 그러나 종종 의문이 든다. 정말로 어쩔 수가 없는 건가?
다 이뤘다.
영화는 삶에 너무나 만족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집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며, 만수(이병헌)는 가족들과 화목한 시간을 보낸다. 사랑스러운 아내 미리(손예진)는 만수가 준비한 생일 선물에 기뻐하고, 아들 시원(김우승)은 여동생 리원(최소율)을 챙긴다.
평화롭고 정겨운 풍경 속에 만수, 미리, 시원, 리원 네 사람이 함께 포옹하는데 두 대형견 시투, 리투도 함께 끼어든다.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오고, 만수는 의기양양하게 다가오는 가을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만수는 순식간에 정리 해고되어 버린다. 게다가 제지업계의 전면적인 구조 조정 탓에 재취업은 더욱 힘들어진다. 계속되는 악순환에 만수는 평정심을 잃는다.
결국 만수는 재취업을 위해 자신처럼 실직자인 경쟁자 범모(이성민)와 시조(차승원) 그리고 만수가 노리고 있는 자리를 이미 선점하고 있는 문 제지의 관리자 선출(박희순), 총 세 명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면서 어쩔 수가 없다고 스스로 되새긴다.
거리를 두고 보면 단언컨대 만수는 결코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만수는 왜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일까. 아마도 이미 다 가져봤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부터 가진 게 없었으면 모를까, 원래 가졌던 것을 잃는 것은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집착하게 되고, 그 욕심이 판단력을 흐린다. 그래서 다른 대안을 탐색하지 못하는 것이다. 원래 가졌던 것을 지키는 데에만 오로지 급급하기 때문에.
결국 만수가 말하는 어쩔 수 없음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자기감정에만 치우치고 매몰된 비이성적인 판단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이상 그 선택을 최대한 잘 이행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당신이 사라져야, 내가 살아!
만수 본인도 어쩔 수가 없지 않다는 걸 조금은 인식하고는 있는지, 범모와 대치하는 장면에서 외친다. "돈을 못 벌면 집이라도 팔아!", "마트 가서 짐이라도 날라!" 그리고 이어지는 씬에서 범모의 아내 아라(염혜란)는 범모에게 말한다. "실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실직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게 문제라고!"
그렇다. 실직 자체는 어쩔 수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실직 이후에 어떤 선택을 할지는 어쩔 수가 있는 일이다. 생활 형편에 맞추기 위해 단독 주택을 팔아서 아파트 전세로 이사를 갈 수도 있는 것이고, 원래 분야에서 취업이 힘들면 다른 분야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만수는 실직에 대한 해법으로 살인이라는 금기를 끝내 실행하고 만다. 처음에는 마냥 미숙했지만 점차 대담해지고 아주 능숙해지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웃픈 상황들이 펼쳐지고 때로는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한다. 영화는 이를 장면마다 감각적이고 재치 있게 묘사한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수는 범모, 시조, 선출을 차례대로 죽인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문 제지의 관리직 자리에 취업하게 된다. 그러나 만수의 기대와 달리 만수의 가족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락한다.
벌레가 끓어가지고 다 죽어가더라
당연히 만수는 완전 범죄를 꿈꾼다. 경찰로부터 혐의를 벗는 것은 물론이며, 가족들에게도 전혀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 운이 좋아서 공식적으로 자신의 범죄 혐의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지만, 가족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까지 피하지는 못한다.
그 모든 발단은 만수 스스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도덕적 굴레의 늪에 빠졌기 때문이다. 인류 최고의 죄목인 살인을 한 번 저지른 이상, 절대 그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가까운 가족에게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기 마련이다. 아내 미리와 아들 시원은 물론 어린 막내딸 리원까지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만수의 변화를 감지한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더 이상 예전처럼 만수를 대하지 않는다.
만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실직 이전의 균형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결국은 재취업에 성공하면서 장인장모에게 보냈었던 시투와 리투를 다시 데리고 온다. 그리고 단독주택을 지키게 되면서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원래 가족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가족 간에 이어져있던 신뢰의 끈이 뚝 끊어져 버린다. 깨진 유리 조각을 다시 흠집 없이 붙일 수 없는 것처럼, 이 단절은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붕괴이다. 따라서 가족 간 화합과 연대는 사라지고, 배척과 불신이 자리 잡게 된다. 리원이 마침내 자신의 첼로 연주를 들려주지만 만수는 이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만수는 자신이 가졌었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본인 딴에는) 어쩔 수가 없이 수 차례의 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나 그로 인해 훨씬 더 귀중한 것을 상실하게 된다. 어쩔 수가 없기에 일들을 저질렀는데 더욱 어쩔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럴라고 만든 시스템이니까요.
어쩔 수가 없죠.
재취업된 공장에서 만수는 홀로 환호한다. 그러나 이내 등장하는 AI 자동화 시스템들은 만수의 취업 상태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만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행동한 것일까.
애초에 모든 원인은 실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그렇고 실제 사회에서도 실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실직은 어쩔 수가 없다고만 말한다.
실직을 그저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하기에는, 실직이 한 사람 혹은 한 가정에 가져다주는 충격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럼에도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실직이라면 과연 만수를 쉽게 욕할 수 있을까.
그런 딜레마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본다. 그러나 결국 나만은 그러한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해당되지 않기를 막연히 믿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