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자퇴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들만 해줬으니까요. 부적응자라는 낙인. 대학 입학이나 취업에 불리할 거라는 우려.
자퇴한 지 11년째.
자퇴 직후 독학하는 1년 동안 외로웠던 때 말고는, 저에게 자퇴는 참 잘한 일이었어요. 더 이상 정답이 무엇인지 찾아 헤매지 않고, 진솔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까요. 다수에 휩쓸리기 전에, 의문을 품어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학교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세상 구경 재미나게 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갑자기, 자퇴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말이에요.
저는 대학 졸업 후 임시직 프리랜서로 다양한 조직에서 여러 일들을 해왔어요. 뭔가를 책임져야 할 정규직이 될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거든요. 대학교 때 뮤지컬이나 영화 쪽으로만 경험을 쌓으면서 뭔가를 발산하는 경험 위주로 했다 보니, 역량이 부족하다 느꼈어요. 그리고 바늘구멍 같은 공채를 뚫고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열망이 생기는 회사도 딱히 없었던 터라.. 계약 형태나 회사보다는, 흥미를 느끼고 뭔가 배울 수 있는 '일' 위주로 찾아다녔죠.
그러다가 작년 겨울, 저랑 결이 맞다고 느끼는 회사, 그동안 쌓아온 역량과 경험을 잘 펼칠 수 있는 한 회사를 만났어요. 서류부터 필기, 역량면접을 거쳐 임원면접까지... 장장 3~4개월에 걸친 채용 과정이지만, 기꺼이 열망이 생기더라구요. 몇백 명이 지원해서 딱 한 명 뽑는 곳이기에, 긴가민가 하긴 했지만,큰 열망은 제가 행동하게 이끌더군요.
시험 준비를 하면서도 그 회사가 나랑 정말 잘 맞다고 생각했고, 주변에서도 잘 어울린다고 했고, 바로 이곳이 운명이다 싶었어요. 처음으로, 진심으로, 정규직이 되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소망한 회사였어요.
그렇게 한 발 한 발 다가갔고, 가까워지는 듯했어요.
실무 면접 때 지원자들끼리 자기소개를 하고 가장 매력적인 사람을 한 명씩 뽑는 순서가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저를 가장 많이 뽑아주셨어요.
그리고 또, 길거리에 나가서 시민 인터뷰를 해서 오디오 콘텐츠를 만드는 미션도 있었는데, 제가 평소에 즐겨하던 일이었기에 신기했죠. 나를 위한 전형인가싶을 정도였어요ㅋㅋ마냥좋아서 하던 일들이 여기서 활용되는구나... 싶으면서 운명적이라고 혼자(?) 착각했습니다ㅋㅋ
물론 시험에 임하는 과정에서 아쉬움도 많이 남았어요. 마지막에 기획안 작성할 때, 노트북 사용 가능에 대해미리 고지해주지 않아서 가져오지 않았는데, 노트북을 가져온 사람은 사용할 수 있게 해줬거든요. 저는 노트북 없이 스마트폰으로만 조사해서 하려니까 괜히 답답해하고 후회하는 데 에너지나 쏟고... 그래서 기획안이 부족했던 것도 같아요.
그래도, 실무면접까지 통과하고, 정신 차려 보니 임원 면접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면접장 분위기도 화기애애했어요. 듣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해준다고, 우리 회사를 정말 좋아한다는 진심이 느껴진다고, 능력은 이미 검증된 것 같다고.
그래서 한껏 기대를 했는데!
탈락했어요.
너무너무 좋아했고, 운명이라고 느꼈던 곳이라서 사무치게슬펐네요. 최종면접 준비할 때그 회사의 90년대 기사부터 다 찾아보고, 그 회사에 대해 생각 정리한 것만 300개가 넘고, 사장님이며 회사분들이 쓰신 책을 십몇만 원어치 사서 읽고... 그랬기 때문에 상실감이 컸죠.
나만 겪는 일이 아니에요. 몇백 명 중에 한 두 명 뽑는데, 합격하는 게 별다른 일인 거지, 떨어지는 건 참 평범한 일일 테니까요.
그런데 자꾸만 탈락의 이유를... 곱씹게 되잖아요.
면접장 분위기는 좋았는데, 공격이었던 질문들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고등학교를 자퇴한 경험이 있는데, 조직원으로서 잘 융화될 수 있는가?"
"지금 우리 회사에 대한 환상이 있는데, 고등학교 때처럼 환상과 다르다고 그만두고 싶어지면 어떡하나?"
"지적 호기심이 많은데, 회사가 그걸 품어줄 수 있는 그릇이 안 되면 어떡하나?"
"이런저런 다양한 일들을 해왔는데, 일상적인 업무들을 수행할 수 있는가?"
흠... 졸업 후 3년 동안 거의 공백기 없이 일 잘해왔고, 매일 출근하는 일상적인 업무도 문제 없이 즐기면서 해왔고, 대학교도 무탈히 졸업하고 일하면서도 조직원으로서 큰 문제없었던 것 같은데...
면접관들의 저 질문에 담긴 의문들이, 제 탈락 사유가 아닐 수 있어요. 다른 역량이 부족했을 수 있죠.
그런데 회사는 제가 왜 탈락했는지 알려주지 않으니까.. 제가 경험한 범위에서 자꾸만 곱씹고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죠.
이미 고등학교 자퇴했고,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 계약이라서 일을 짧게 짧게 해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이렇게 살아온 인생이고, 바꿀 수 없는데.어찌하란 말인가...
그래서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됐어요. 내가 어떻게 살아왔더라, 잘못 살아온 걸까, 앞으로에 걸림돌이 될 만하게 살아왔던가... 되짚어 보는 과정이었죠.
최종면접 탈락.
충격, 고통, 슬픔, 우울, 해탈, 또 슬픔, 덤덤... 뭐 시련당한 거랑 비슷하더라구요.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나 요즘 같은 취업난 시대에는요. 요즘 같은 시대에, 취준생이 우울증 안 걸리기가 더 어렵겠더라구요.
전, 이제 정규직이 되고 싶어요. 그동안,좋아하는 일들 위주로 찾아다닌 덕에 너무 즐겁고, 보람 있었고. 소중한 추억이자 경험들이 쌓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독립하려면 대출도 받고 싶고, 계속 고용 불안정에 시달릴 순 없을 것 같고.지금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결혼도 하고 싶은데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할 테고. 무엇보다, 저는 일을 정말 좋아하는데! 프리랜서로 있으면 일이 언제 끊길지 모르더라구요ㅜㅜ
그리고 3년 동안 다양한 일들을 하면서 충분히 역량을 쌓았다고 느끼나 봐요. 이제는 책임감 갖고 주도해서 뭔가를 하고 싶어졌어요. 정규직으로서 업무를 해낼 자신감과 책임감이 생겼다구요!!
무엇보다, 저는 회사 다니는 게 너무 좋아요. 혼자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건 안 맞다는 걸... 자퇴 한 번 해보고 너무 절실하게 느꼈고. 저는 사람들과 같이 하는 걸 좋아해요. 사적인 약속보다, 회사 사람들이랑 이것저것 프로젝트 진행하는 게 더 즐거울 정도예요. 회사, 계속 다니고 싶다구요!!!
아, 그런데 이건 지금의 소망이고. 뭐 인생, 내 뜻대로안 되는 거 많고. 지금의 뜻이 나중에, 멀리서 보면 차라리 다른 길이 나을 때도 있고 그러니까. 뭐. 에휴. 몰라요.
앞으로는, 어떤 삶을 그려나갈까요?
아! 이거 하나는 분명해요.
고등학교는 자퇴했지만, 더 큰 학교로 나왔다는 거요. 세상을 학교 삼아 배우고 있어요. 택시 기사님, 미용실 이모, 회사 부장님 차장님들, 친구, 아는 동생 등... 그들 모두가 하나의 책이고, 그들과의 대화 자체가 공부더라구요.
고등학교 자퇴는, 어쩌면 자퇴가 아니었어요. 더 큰 학교로의 전학이랄까. 하하. 그리고 저는 그 학교를, 퍽 애정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