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진 어떤 형태가 나쁜 게 아니라 좋은 형태였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사람들이 받아들여오지 않았을까 싶어요
Q. 21세기에 클래식을 한다는 건?
= 클래식은 음악이 어쿠스틱 하다 보니까, 믹싱을 하면 할수록 소리가 예뻐지는 게 아니라 뭔가 깎이는 느낌이 드는데 매력이 없어져요. 어쿠스틱한 순수 예술이 21세기랑 별로 안 맞는 것 같아요.
Q. 클래식 작곡은 화성학 규칙 같은 게 있잖아요. 규칙에 맞춰서 틀을 잡아놓고 하시나요? 아니면 규칙 없이 생각나는 대로 작곡하시나요?
= 화성학은... 언어로 비유해 보자면, 자음 모음을 가지고 글자를 만들어내는 게 ‘화성학’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적확하다’라는 형용사가 있으면, 이 형용사를 어디에 쓸 것인가...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면 의미가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런데 어떤 어휘들이 적절한 상황에 놓였을 때 효과적인 게 있잖아요. 화성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거죠. 좀 더 다양한 어휘들을 가지고, 상황에 맞춰서 좀 더 정교하게 만드는 게 화성이죠.
6분짜리 곡을 쓴다고 하면, 다 써놓고 한 마디에 한 음을 뭘로 할지를 가지고 한 3일 고민해요. 음 하나 가지고 3일 걸려요. 듣는 사람은 그냥 지나가면서 모를 수 있는데, 나는 알잖아요.
그리고 작업방식은, 곡마다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떤 곡은 멜로디에서 시작해서 쭉 가는 경우도 있고, 구조(전체적인 플롯)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
Q. 그다음에 감성, 정서를 담나요?
= 감성이나 정서가 안 담기진 않는데..
Q. 음이나 청감에 집중한다고 봐야 하나요?
= 네. 클래식은 그게 좀 더 강하죠. 대중음악은 영감이나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게 많은 것 같다면, 클래식은 영감이 떠오르면 그걸 섬세하게 조직해 내는 게 훨씬 커요.
음의 흐름을 따라가는 거죠.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계속 구상하고, 중간중간 돌아보면서 어색한 부분이 있으면 수정하고.
예를 들어, 어떤 멜로디가 있다고 하면, 그 멜로디를 수식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변주 형태에 따라서, 똑같은 멜로디인데 슬프게 들릴 수도 있고, 기쁘게 들릴 수도 있고. 혹은 격정적이거나 웅장하거나 다양한 방법들이 있어요.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내냐.
Q. 그런데 피아노 연주를 오래 하셨으니까, 기존 클래식 음악의 구조는 이미 파악이 좀 된 상태죠?
= 그 구조라는 표현이 정확히 맞진 않아요. 좀 음악적이지 않은 단어에 빗대서 설명해 보자면, 시나리오나 플롯에 가까운 것 같은데.
하다못해 베토벤 교향곡도 짧은 교향곡인데 30분씩 하거든요. 앉아서 30분 동안 음악만 듣고 있는다라는 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잖아요. 음악은 3분 넘어가면 지루한데. 1시간 40분 넘어가는 교향곡도 있거든요.
플롯이 음악에도 있는 건데, 개념화돼 있는 게 아니다 보니까. 영화에는 캐릭터, 기승전결처럼 일상의 언어로 개념화된 것들로 인해서 진행이 되니까 이해할 수가 있죠.
그런데 클래식 음악의 시나리오는 추상적이다 보니, 그런 추상적인 논리에 익숙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알기 어렵죠.
Q. 그런데 클래식처럼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인 걸 다루는 일은 어때요?
= 클래식이, 저한테는 아주 구체적인 작업이에요.
한국에서 클래식 진입장벽이 높은 이유가... 예를 들어, 시 같은 경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국어 시간에 배우잖아요. 시에서 심상, 비유적 표현, 대구 뭐 이런 것들을. 그런데 시도 성인 될 때까지 아예 안 읽고 살았으면, 시도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고 추상적으로만 느껴졌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클래식은 어릴 때부터 접할 기회가 별로 없다 보니 마냥 추상적으로 다가오죠. 클래식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굉장히 구체적으로 느껴지거든요.
Q. 그런데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는 스토리의 원형 같은 것들이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김은숙 작가의 <파리의 연인>은 영화 <귀여운 여인>의 플롯 구조와 비슷하다거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토리의 원형, 구조라는 건 뭘까요?
= 논의 거리가 많은 질문인 것 같은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조라는 건, 제 생각에는 ‘익숙함’이 크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전체적으로 좋은 구조여서라기보다는, 익숙하기 때문에.
익숙함이란 건 뭐냐면.. 어떤 상황이든 갈등 상황이 있는데, 갈등 상황만 2시간 있으면 피곤하잖아요. 완화되고 해소되기도 했다가, 다시 갈등과 긴장 상황에 놓이고.
고구마랑 사이다라는 표현도 있잖아요. 갈등과 해소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진행이 돼야 하는데, 갈등이 고조되는 정도, 해소되는 순간 같은 게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는 게 있죠. 그래서 그 익숙해져 있는 순간보다 길어지면 고구마라고 그러는 거고.
Q. 그럼 드라마 작업도... 구조를 잡아놓고 하는 게 나은 거겠죠? 생각나는 대로 휘리리릭 쓰는 것보다
= 드라마도 음악처럼 극마다 좀 다를 것 같은데.
30분짜리 단편영화일 수도 있는 거고, 한 시간짜리 24부 드라마일 수도 있고, 60부, 150부 드라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에 따라서 접근하는 방식도 다를 것 같아요.
150부 드라마를 쓴다고 하면, 중간중간 세부적인 내용들은 그때 가서 정할 수도 있는 거지만, 하다못해 어떤 갈등이 대략적으로 일어나고, 갈등의 원인은 무엇이었고, 그 갈등으로 인해 어떤 것들이 파생되고, 어떻게 갈등이 해소가 되고, 어떤 결말인가에 대한 큰 그림을 가져놓고 극이 진행이 돼야 보는 사람이 극의 방향성을 알 수 있죠. 그렇지 않은 드라마나 웹툰들이 질질 끈다는 평을 듣게 되잖아요.
Q. 그런데 방향성이 꼭 있어야 할까요? 저는 주제의식, 결말, 방향성 없는 글이 좋거든요. 뭔가를 단정 짓거나 판단하기보단, 그냥 이러이러한 게 있었어라고 보여주는 글이요.
= 짧은 글이면 괜찮은데, 글이 길어지다 보면, 사람들이 글을 읽으면서 따라갈 것들이 필요한데 ‘어쩌라는 거지?’ 할 수도 있잖아요.
Q. 마지막 질문. 대중적인 것은 익숙함에서 온다는 생각을 어쩌다가 하게 되셨어요?
= 음악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는, 익숙해진 어떤 형태가 그래도 나쁜 게 아니라 좋은 형태였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사람들이 받아들여 오지 않았을까 싶어요.